[독일] 노·사 갈등 속 경쟁력 강화 암중 모색
  • 프랑크푸르트·허 광 통신원 ()
  • 승인 1998.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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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강화 전략 놓고 노·사 갈등 심각… 노조 약화·복지 축소에 우려 목소리 높아
축구에 열광하는 독일 사람들이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실제로 독일 정치가들이 해답을 찾고 있는 문제다. 독일의 미디어 그룹 콘체른 키어시가 2002년 월드컵 독점 중계권을 사버렸기 때문이다.

키어시가 세계축구연맹(FIFA)에 내놓은 돈은 무려 10억 달러. 독일에서 월드컵 중계 방송은 키어시가 소유하고 있는 Pay TV가 독점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상업 방송이 디지털 텔레비전이라는 사실이다. 디지털 텔레비전을 보려면 백만원이 넘는 수신기를 사서 달고, 매달 시청료도 따로 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모두 이런 엄청난 비용을 댈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올 가을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지사들이 자난해 11월 긴급 회동해 ‘월드컵 중계는 공공의 관심 사항이며 사기업이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미 10억 달러를 투자한 기업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키어시는 사유재산권이 침해받을 경우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반발했다. 키어시는 영화·음반 산업을 비롯해 독일의 문화 산업을 장악하겠다는 야망을 키우고 있다. 그래서 파바로티와 카라얀 등 유명 음악가들의 주요 작품 판권을 10억 달러나 투자해 사들였다. 독일의 축구 열기를 이용해 디지털 텔레비전 시장까지 장악한다면 이 여세를 몰아 유럽 시장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그런 전략을 세우고 월드컵 중계권을 따놓은 마당에 정치인들의 간섭에 부닥친 것이다.

월드컵 중계를 둘러싼 문제는 독일만의 특수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기업이 국제 경쟁력을 키운다는 이유로 이윤 추구를 극대화해 국민의 이해와 충돌한 전형적인 예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의 경제 논리’에 정치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께’로 시작되는 편지가 지난 1월에 콜 연립 정부 소속 의원들 사무실에 전달되었다. 발신인은 노버트 블륨 노동장관이었다. 편지에는 먼저 그가 노동장관에 취임한 82년 이후 지난해까지 예산 삭감을 위해 만든 법안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런 법안에 따라 실업수당과 연금 지출 부문에서 9백80억 마르크를 절감했다는 것이다. 또 그동안에 뜯어고친 노사 관계가 어떤 것들인지 세세하게 보여주는 목록도 있다. 이런 모든 조처가 세계 시장에서 독일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독일의 경쟁력이 82년 이래 얼마나 커져 왔는지, 그리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는 부연 설명으로 편지는 끝을 맺었다.

블륨 장관은 콜 정부에서 좌파 노선에 서 있다. 정부 안에서 노조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가 최근 진통을 겪는 노사 문제로 대기업 쪽의 반발을 사고 있다. 편지를 돌린 배경도 여기에 있다. 문제의 발단은 기업연합회장 헹켈의 발언이었다. 헹켈은 올해 초 과거 동독 지역에 있는 경영주들에게 산별 노조와 체결한 협약을 무시하고 기업별 협약으로 대체하라고 요구했다. 기업 파산을 막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산별 협상은 독일 노조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다. 그러나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협상을 할 수 있게끔 많은 부분에서 예외 조항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예외 조항은 산별 협약에서 다룰 수 없는 기업 차원의 문제를 기업 노조가 자발적으로 보완토록 하는 것이지 산별 협약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이런 관행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97년에 자동차 부품업체인 피스만에서 일어난 일이 변화의 발단이 되었다. 공장을 체코로 이전한다는 경영자측 방침이 나오자 노사협의회가 일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근로 시간 연장을 제안해 공장 이전을 막은 것이다. 이로써 기업주측의 압력에 굴복해 산별 교섭권이 무시된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헹켈은 바로 이런 사례를 과거 동독 지역의 전체 기업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기업 파산을 막기 위해 노동 조건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사실은 산별 노조를 무력화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헹켈의 요구는 사용자협의회에서도 반대하고 나서 아직 관철되지는 않았다.
노동 생산성은 상승, 임금 상승률은 하락 ‘모순’

문제는 산별 노조를 약화시켜 노조 자체를 무력화한다는 급진 노선이 대기업 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노선은 곧 독일의 전후 사회를 유지해 온 노사협상 원칙이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헹켈은 ‘방해받지 않고 투자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에 추가하자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블륨이 쓴 편지에는 노동부가 기업쪽 요구대로 할 일을 다했으니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의지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블륨과 헹켈이 세계화를 위해 내놓은 처방에는 공통점이 많다.

먼저 경제 세계화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복지 사회를 유지할 수 없으며, 또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임금과 사회복지 비용부터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해외에서 독일 기업이 생산하는 규모를 보면 93년 생산액이 4천4백억 마르크에 고용 노동자가 1백70만 명이었다. 그런데 이들 해외 생산은 고임금 지역인 서유럽과 북미에 집중되어 있다. 현지의 시장 개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기업의 해외 이전은 국내 임금 수준과는 무관하다.

실제 저임금을 노려 해외로 빠져나가는 기업은 독일 기업 가운데 6%밖에 안된다. 무시해도 좋은 규모이다. 직접 투자 지역은 93년에 54%가 유럽연합, 28%가 미국이다. 아시아는 80년 이후 절반으로 줄었다. 대기업 간의 제휴를 보면 독일 기업끼리가 33%, 유럽 기업 27%, 미국 기업 11%를 차지한다. 유럽 기업과 제휴한 회사 중 60%가 유럽 내에서 생산한다. 연구 개발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대개는 북미나 아시아의 해외 생산 기지와 분리되어 있다. 독일 기업들은 대부분 유럽 내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생산 비용 때문에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경제 세계화’는 사실의 일부분을 과장한 것이다. 국가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으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없다. 독일 산업의 기술 우위는 여전히 세계 수준이다. 수출 산업은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10% 이상 성장해 왔다. 문제는 오히려 소득의 역진성이다. 지난 15년 동안 생산성 증가에 비해 임금 상승률은 계속 감소했다. 그 결과 상위 20%의 국민이 76%의 재산을 갖게 되었다. 실업 인구는 97년에 4백50만으로, 통일 이후 6년 만에 3배가 늘었다. 독일의 무역 흑자는 작년에 천억 달러를 넘어섰고 기업들의 평균 이윤도 10% 이상 늘었다. 그런데도 생산성 증가가 고용 증가로 연결되지 않아 소득 격차가 커지고 있다.

“경제 세계화는 정치 전략에서 나왔다”

‘세계화’라는 담론에 비판적인 논자들은 이런 현실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경제 세계화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본을 재구성하기 위한 정치 전략이다. 이런 담론을 통해 자본측은 사회를 위축시키고 자신의 정치 전략을 관철하려 하는 것이다.’ ‘전후 독일의 사회 국가는 경쟁 국가로 전환하고 있다. 경쟁 국가는 노사 간의 타협 체제를 거부하고 고용 보장을 포기한다.’ ‘경쟁 국가는 시장에서는 물러나지만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으로 강화된다. 자유민주주의는 축소되고 정당·노조 등 사회 조직은 약해진다.’

왜 독일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중에는 전후 독일의 사회적 합의였던 노사 협조 체제가 70년대 말부터 점차 이완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노동력을 배제하는 기술 혁신이 일어나 노사간 균형이 무너진 결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런 현상은 독일이 유럽 통합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서유럽 전반에 파급되고 있다. 유럽 단일 화폐 도입을 앞두고 독일 중앙 은행이 요구하는 조건에 재정 안정 기준은 있어도 실업률 기준은 없다. 단일 화폐가 도입되면 실업 문제가 해소된다는 논리가 있지만, 콜 총리가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인 만큼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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