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못된 자들, <영웅시대>가 두렵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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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병철과 현대 정주영의 생애를 그린 MBC 드라마 <영웅시대> 때문에 재벌·검찰·정계가 야단법석이다. 재벌은 제작을 중단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국 사회 최고 파워 집단인 이들이 왜 이렇게 난리일까?
드라마 한편 때문에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과 검찰, 정치권이 일희일비하고 있다. MBC가 방영하고 있는 문제의 드라마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생애를 그린 경제 드라마 <영웅시대>이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 즉 ‘한강의 기적’을 다룬 이 드라마는 캐스팅에서부터 여타 드라마를 압도한다. 차인표 전광렬 유동근 임채무 김갑수 최불암 이순재 등 주연급 연기자가 다른 드라마보다 곱절로 많이 출연한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는 이순재 최불암 정한용 등 전직 국회의원이 3명이나 등장해 화제다.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발표가 나가자 삼성그룹과 현대·기아 자동차는 강하게 반발하고 유·무형의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두 그룹의 반발에 신호균 책임프로듀서는 “드라마는 두 창업주의 삶으로부터 모티브를 따 왔을 뿐 내용은 허구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연막작전일 뿐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드라마의 내용이 거의 재현 드라마나 다름없었다.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극중 천사국, 김갑수 분)의 자살 전후를 다룬 1회의 내용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실과 흡사했다. 제작진은 정회장이 뛰어내린 창문 모양과 떨어진 자세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극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중견 배우들이 실존했거나 실존하는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 냈다. 김갑수씨가 뿔테 안경을 쓰고 나와 무표정하고 초췌한 인상으로 고 정몽헌 회장을 연상시킨 것을 비롯해, 정주영 전 명예회장(극중 천태산)의 노년 역을 맡은 최불암씨는 목소리까지 흉내 내고, 이건희 회장(극중 국철규) 역을 맡은 임채무씨는 이건희 회장의 꾸부정한 몸짓과 눈을 껌뻑이는 버릇까지 따라 했다. 정몽구 현대·기아 자동차 회장(극중 천이국) 역은 이덕화씨에서 정회장과 외모가 닮은 정한용씨로 교체되기도 했다.

특수 효과를 활용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을 재현한 제작진은 교묘한 ‘병 주고 약 주기’ 전략으로 시비를 피해갔다. 고 정몽헌 회장의 자살을 소재로 다룬 대신,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에 대한 명분을 충분히 부각해 줌으로써 균형을 맞추었다. 특히 배우 김갑수씨의 열연은 그의 죽음을 숭고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시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1·2회 방영이 끝나자, 유탄을 맞는 기업가·검사·정치인이 속출하고 있다. 가장 치명상을 입은 사람은 정몽구 현대·기아 자동차 회장이다. 드라마를 통해서 그가 현대그룹의 법통을 잇는 적자가 아님이 환기되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천태산 명예회장은 대북 사업을 승계시키기 위해 천사국 회장에게 세기그룹(현대그룹)의 대권을 넘긴다.

현대가의 가신들도 일희일비하고 있다. 실제 유서에서처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진정한 아들로 묘사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극중 임태석)은 웃을 수 있었지만, 배신자로 묘사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극중 김국태)은 울어야 했다.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 드라마로 가장 큰 유탄을 맞은 곳은 삼성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 드라마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생애와 현대가 2세 그리고 가신들에 대한 이야기로 기획되었다. 그러던 것이 제작진이 1980년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니 시리즈 <카인과 아벨>을 참고하면서 양대 재벌가 이야기로 바뀌었다.

라이벌 기업의 이야기를 다룬 <카인과 아벨> 역시 수용소 출신으로서 자수성가한 저돌적인 기업가와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합리적인 기업가의 대립을 기본 얼개로 하고 있다. 두 주인공이 스치듯이 만나 운명적으로 얽히는 것 또한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카인과 아벨>에서는 두 주인공의 아들과 딸이 사랑하게 되지만 <영웅시대>에서는 두 주인공이 여주인공 박소선(김지수 분)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 정도다.

결과적으로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영웅으로 묘사되기는 하겠지만, 삼성으로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만만치 않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고 이병철 회장이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것 등 그룹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는 지난날이 환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그룹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이건희 회장으로 경영권이 승계되는 과정이다.

1966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이병철 회장이 잠시 물러나고 이맹희 회장(극중 국철민)이 그룹 경영권을 인수했다. 얼마 후 이맹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려는 이병철 회장을 막으면서 삼성판 ‘양위파동’이 벌어졌다. 부자 간의 경영권 전쟁은 이병철 회장의 승리로 끝나고 이맹희 회장은 낭인으로 전락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재용 상무의 경영권 승계 문제로 노심초사하는 삼성그룹으로서는 여간 껄끄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검찰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고 정몽헌 회장의 자살을 부른 것이 검찰의 압박 수사 때문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고 정몽헌 회장이 심문받는 과정은 다분히 강압적인 분위기로 묘사되어 있다. 검찰은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의 대질신문 같은 것은 없었고, 수사를 지휘했던 안대희 중수부장(김상훈 분)이 이명박 의원(극중 박대철, 유동근 분)을 만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정치권도 <영웅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경제 논리를 중심에 둔 경제 드라마이기 때문에 다분히 정치인들이 모리배로 묘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2회 방영분까지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지만 총선에서 참패한 민주당만은 연타를 맞았다. 청문회에서 천태산 회장에게 시비를 걸고 삿대질을 하는 의원의 소속 정당이 민주당의 뿌리인 평화민주당으로 명시되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순전히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덕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최대 수혜자가 될 뻔했다가 드라마를 망친 주범으로 몰린 사람도 있다. 바로 이명박 서울시장이다. 드라마 제작 사실이 알려지자 현대·기아 자동차 관계자들은 이환경 작가와 이시장의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했다.

드라마가 시작되자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고 정주영·이병철·정몽헌 회장과 함께 이시장은 ‘성인’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이시장은 드라마의 중심이었다. 이시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정신적 지주로 묘사되었고, 샐러리맨 신화를 완성한 인물로 극중 화자 역할을 맡았다. 제작진은 이시장 역을 맡은 유동근씨(극중 박대철)가 탄 차 뒤로 서울시청이 보이도록 섬세하게 배려하기도 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린 KBS <야망의 세월>(1991년) 덕분에 쉽게 금배지를 달았던 이시장은 <영웅시대>로 대권 레이스에 한 발짝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울시 봉헌’ 발언과 버스 체계 개편에 따른 혼란 등 거듭되는 그의 실정으로 인한 실존 인물과 극중 인물의 괴리는 시청자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네티즌들은 박대철 역을 개그맨 서승만씨로 교체하라고 아우성을 쳤다. 서씨의 외모와 촐랑거리는 이미지가 이시장과 닮았다는 것이다. 진화에 나선 제작진은 박대철 역의 비중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이시장 역을 맡아 피해를 본 유동근씨는 이시장을 만나 시민들의 고통을 전달하겠다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이시장 역을 맡은 유동근씨가 수난을 당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고 정몽헌 회장 역을 맡은 김갑수씨는 시청자들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고 있다. 김씨는 고 정몽헌 회장의 1주기 추모행사에도 초청받았다. ‘현대를 사랑하는 모임’은 ‘고인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고인의 유지가 시청자 및 국민 여러분께 올곧게 전달되었다’며 김씨를 행사에 초청했다. 죽은 몽헌이 산 명박을 잡은 셈이다.
드라마가 진행되면, 특히 2기로 들어서면 앞으로 이런 논란은 더욱 많아질 전망이다. 그룹 총수의 복잡한 사생활을 암시하는 부분과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이 이미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체 드라마의 프롤로그 성격인 1·2회에서 사실을 재현 형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제작진으로서는 이미 주사위를 던진 셈이다. 시청자들이 상당 부분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칼자루를 쥔 곳은 방송사다. 두 그룹의 치부를 소재로 활용할 수도 있고 성과를 미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드라마에 꼭 필요한 요소여서 병 주고 약 주기가 가능하다. 회당 제작비가 1억5천만원(전체 100회 예정)에 이르기 때문에 MBC도 물러설 수 없는 처지이다. 여기에 드물게 PD 출신 사장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 드라마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화제와 논란의 드라마 <영웅시대>의 조타수는 이환경 작가다. 이씨는 여러 모로 고 정주형 회장을 닮았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라는 점도 그렇고, 자수성가해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도 그렇다. 그 역시 공사장 막노동판에서 사회를 배웠고 중동 건설 현장에도 다녀왔다. 이제 모든 것은 작가의 펜 끝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시청률 제단’에 성역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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