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 ‘원맨쇼’에 웃고 울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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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산업 무한 경쟁의 최대 패배자 된 한국일보 50년사의 명암
4대 일간지. 지금은 생소한 말이지만, 불과 10여년 전까지 국내 메이저 언론을 부르던 약칭이다. 조선·동아·중앙과 함께 한국일보가 여기 속했다. 한국이 대열에서 탈락한 뒤 새로 정착한 용어가 이른바 ‘조중동’이다. 그 후 이들 족벌 신문을 비판하면서 ‘한경대’(한겨레·경향·대한매일)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한국일보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두 세력 중 어디에도 끼지 못한 신문. 이는 오히려 한국일보의 오랜 장점이었다. 한국일보는 좌나 우가 모두 일사불란하게 소리칠 때 리버럴한 자세를 유지했던 흔치 않은 신문이었다. 조선·동아처럼 ‘민족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뚜렷한 색깔이 없으면서도 지식인들이나 젊은층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국일보는 1954년 6월9일 창간되었다. 한국은행 부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장기영씨가 창업주이다. 한국일보 역사에서 장씨가 차지하는 위상은 크고 독특하다. 장씨의 호는 백상(百想). ‘백가지 생각’이라는 뜻처럼 관심도 많고 간섭도 많았던 그는 초창기 발행인·편집인·편집국장을 겸하며 불도저 식으로 신문사를 키워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후에 국회의원과 노동부장관을 지낸 남재희씨는 백상을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신문 기업가’라고 평했다. 그와 일했던 기자들의 회고담을 모은 <백인백상>(한국일보사 펴냄)에는 ‘경쾌한 왕초’나 ‘보조 기자’로서의 그의 일화가 수두룩하게 실려 있다.

백상이 생존하던 시절 한국일보는 돌파력과 기동력을 갖춘 젊고 패기 있는 신생지로 신문 시장을 장악해 갔다. 백상이 한국 언론사에 끼친 가장 큰 공으로 특유의 인사 정책을 꼽는 이들이 많다. 견습기자 제도를 가장 먼저 정착시켰고, ‘가는 사람 쫓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인재를 모았다. 편집국에는 타사에 비해 많은 기자들이 북적거렸다. 임금은 상대적으로 적어 기자들의 이동이 잦은 편이었다. 이런 요인이 겹쳐 한국일보는 기자 사관학교로 불렸다.

알 만한 원로 언론인 가운데 한국일보 출신이 유독 많은데, 자유주의적인 회사 풍토답게 출신 기자들의 스펙트럼도 넓다. 가령 언론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송건호·김중배 씨와 보수 정객인 최병렬·이동복 전 의원은 같은 시기에 편집국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 사이다. 방송작가 한운사, 소설가 김 훈 씨와 시민운동가 정광모씨(한국소비자연맹 회장), 현역 최고령 기자 조동표씨(스포츠 전문 기자)와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도 한국일보 출신이다.

장기영의 ‘원맨쇼’(한 전직 기자의 표현)는 한국일보에 약이자 독이었다. 장씨는 1963년부터 3년간 경제 부총리로 입각했고, 1973년부터 1977년 심장마비로 작고할 때까지는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다. 논설위원을 지낸 한 전직 기자는 “한국일보는 1960년대까지 동아에 이은 2등 자리를 지켰지만, 장기영 사주가 정치권에 들락거리면서 독자들에게 친여당지라는 의구심을 사기 시작했다. 이게 한국일보의 성장을 멈추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라고 평했다.

한국일보는 1980년 자매지였던 서울경제를 신군부에 뺏기면서 타격을 받았지만, 권력의 비호와 신문사간 카르텔 형성으로 현상 유지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바람이 언론사의 자유 경쟁으로 확산되면서 본격적인 위기가 닥쳤다. 결국 백상의 장남으로서 경영을 이어받은 장강재 회장은 생존 방책으로 공격 경영에 나섰다. 월요판 발행(1989년 7월), 조·석간 동시 발행(1990년 말), 창원 분공장 준공 등이 잇따랐다. 그러나 광고 물량이 뒷받침되지 않은 데다 배달 체계의 한계로 모두 실패했다. 과잉 투자의 결과로 빚만 쌓였다.

반면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경쟁하며 선도한 증면과 섹션화, 조간 전환과 가로짜기 등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재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일보의 공격 경영은 신문 시장 재편으로 이어졌다. 한국일보가 메이저 신문 대열에서 탈락한, 다시 말해 ‘조중동 시대’가 열린 것도 이때부터다. 나아가 장강재 회장 급사와 형제들의 반목과 갈등이 겹치면서 한국일보의 침체는 가속화했다. 한국일보 임원 출신인 한 전직 기자는 “장기영 사주 이후 한국일보에는 신문을 아는 오너도 없었고, 외부 변화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부패하기만 한 오너 집안 자손들이 한국일보를 망하게 만든 주범이다”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무색무취한 사풍을 몰락의 원인으로 꼽는 시각도 있다. 한 현직 기자의 말이다. “한국일보는 한때 불편부당이나 중도의 상징이었다. 이런 리버럴함은 정치 과잉 시대에 단점으로 변했다. 누구 편이냐를 가르는 사회에서 우리는 설 자리가 없었고, 결국 ‘원 오브 뎀’으로 떨어졌다.”

지난 6월14일 저녁 서울 중구 정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한국일보 창간 50주년 리셉션이 열렸다. 샤갈전 개막식과 함께 열린 이날 행사에서 장재구 회장(백상의 차남)은 “삶의 밝은 측면을 긍정적으로 그려낸 샤갈의 따스한 작품들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우리에게도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김원기 국회의장을 비롯해 정동채 문화관광부장관,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반면 거기서 직선 거리로 불과 1.4km 떨어진 한국일보 본사 편집국은 난파선 분위기다. 석 달 사이에 22명이 ‘탈출’했지만 아무도 이들을 비난하지 못했다. 한 중견 기자는 “종이 신문 시장에서는 조선·중앙 외에는 살아 남을 가능성이 없다”라고 말했다.

한때 언론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그런 무소불위 언론 시대는 이제 옛이야기다. 김영욱 한국언론재단 책임연구위원은 “한국도 이제 합리성이 증가하면서 권력의 힘으로 봐주려고 해도 봐주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부동산 팔고, 아들들은 부친의 유지를 위해 빼돌린 돈을 헌납해야 한다. 그러면 사우들도 십시일반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임원 출신인 한 전직 기자가 한국일보를 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며 제시한 내용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가능성을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족벌 언론의 주먹구구식 경영과 신문 시장의 격변 속에서 약한 고리가 된 한국일보의 석양이 쓸쓸히 다가오고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비상 대의원대회를 열고 있던 지난 8월6일 저녁, 종이 신문을 대신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한 인터넷 매체는 이런 제목의 기사를 메인 화면에 올렸다. ‘한국일보, 존망의 갈림길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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