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농부들의 성난 외침 "농민의 길은 저승길"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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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짓눌려 줄줄이 음독… IMF 귀농자도 빚 대문에 '탈농'

사진설명 '근조 조국농업' : 지난 12월 7일 충북 농민들은 농기계를 각 시·군청에 반납한 뒤 청주 종합체육관에 모여 "농가 부채 해결하라"고 목소를 높였다. 상여를 앞세운 시위대는 충북도청앞까지 진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도심 한복판에 상여가 등장했다. 화려한 꽃상여가 아니다. 광목으로 치장된 상여다. 이 상여는 한 사람의 망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근조 조국농업'. 그것은 4백50만 농민들의 한을 담고 있다. 지난 12월7일 오후 1시 30분 청주 종합체육관 앞에 농사꾼 2천명이 모였다. 농가 부채 해결을 촉구하는 충북 농민 집회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곡성이 터져 나왔다. 이재선·안창규·안완식·윤춘실·윤재임·박 아무개. 지난 한 달 사이에 세상을 등진 충북 농민 6명의 위패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 숙인 채 흐느꼈다. 이들은 모두 농가 부채에 시달리다 농약을 마셨다. 1991년이 대학생 분신 정국의 해였다면 2000년은 농부 음독의 해라고 부를 만하다.

"창규야 이눔아. 니 믄저 가면 워쩌냐"라며 음성군 농민회 이제욱씨는 눈물을 흘렸다. 이씨뿐 아니라 집회에 모인 주름진 얼굴들도 이내 붉게 물들었다. 검게 탄 얼굴들이 붉어진 것은 분노로 화가 치민 데다 막걸리를 마셨기 때문이다. 농민 집회에서만 볼 수 있는 막걸리판에 농투성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눔의 타는 속, 막걸리라도 묵으야지. 워쩌게 진정시켜. 저 죽은 사람들 심정이 내 가심과 한가지여"라며 한 농부는 넋두리를 풀어냈다.


충북 지역 농민, 한달 사이 6명 자살

환갑을 훌쩍 넘긴 이재선씨(65)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연대 보증이었다. 이씨는 1991년 조카 김인종씨가 양계 사료대 1천7백만원을 빌릴 때 연대 보증을 섰다. 채무자였던 김씨는 1996년 1월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씨가 숨지자 부채는 연대 보증인이었던 김씨의 동생 김종태씨와 이씨에게 넘어왔다. 실제 양계장을 운영했던 사람은 동생 김종태씨였다. 그는 닭 3천마리를 키우다 1992년 파산했다. 삼촌인 이씨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김씨는 이자만은 꼬박꼬박 갚아 왔다. 그러나 원금을 갚을 길이 없고, 결혼도 하지 못해 비관해온 김씨는 지난 2월 그라목손(제초제)을 들이키고 마흔 네 살의 삶을 마쳤다. 1천7백만원 부채는 고스란히 이씨의 몫으로 남았다. 살미농협은 장기 미납 채무로 분류해 고려신용정보주식회사 충북지사에 원금 회수를 의뢰했다. 고려신용정보는 이씨에게 10월23일까지 원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아 회수하겠다며 경고장을 보냈다. 이씨는 10월24일 제초제를 마셨다. 1천7백만원의 농가 부채가 2명의 목숨을 앗아간 셈이다.

농가 부채는 정작 이씨처럼 나이 든 농민보다 흙에 뼈를 묻기 위해 농촌에 투신한 젊은 농부들에게 치명상을 안기고 있다. 농림부에 따르면, 60세 이상 농민의 평균 부채는 1천3백만원 미만이다. 그러나 45세 미만인 젊은 농사꾼들은 3천만원이 넘는 고액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과학 영농을 꿈꾸며 정부의 농업 경영 개선 자금을 받은 차세대 농사꾼들이다. 일부에서 지적하듯이 농협 빚으로 차 사고 집 사서 도시로 떠난 '얌체 농부'는 극소수라고 진짜 농사꾼들은 해명한다. 지금 고통받는 이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열심히 일해온 농사꾼이라는 데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구조개선자금 42조원, 고스란히 농민의 빚


지난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충북도연맹 부의장을 지낸 안창규씨(44)는 촉망받는 차세대 농사꾼이었다. 그는 담배 농사와 오리 사육으로 한 해 5천만원 소득을 올릴 정도로 농사에 소질이 있었다. 대안을 제시하는 농민운동을 펼치려 했던 안씨는 1995년 정부가 신농업 정책의 한 가지로 추진한 유기질 비료공장을 음성군에 설립했다. 안씨는 오리 사육도 포기하고 농민회 동지 7명과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유기질 비료 생산에 뛰어들었다. 환경 농업으로 한 차원 높은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정부의 신농업 정책은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는 초기 자금만 대주었을 뿐 후속 자금을 지원하거나 사업지도를 하지 않았다. 1995년에 완공된 유기농 비료공장은 이듬해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대지 1천40평에 건평 5백평, 정부 지원 2억7천만원, 농협 융자 1억3천5백만원과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4천5백만원으로 설립한 공장은 애물로 전락했다. 동지애와 환경 농업을 내걸고 시작했던 부푼 꿈은 좌절했다. 안씨를 비롯한 7명이 담보물로 잡힌 땅 2만평과 집이 경매에 부쳐졌다. 안씨의 집도 11월27일 3차 경매를 앞두고 있었다. 모든 것을 차압당한 안씨는 10월24일 자신의 인생을 반납했다. 할머니·어머니와 두 아들을 위해 안씨는 죽음으로써 경매를 유보시켰다. 부인 김 아무개씨(42)는 12월1일부터 시내에 있는 공장에 나가고 있다.

정부 정책을 믿고 청춘을 농촌에 바친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야망리 임성남씨(31)도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농촌에서 떼밀려 쫓겨날 처지다. 정부가 1992년부터 농어촌 구조개선자금으로 젊은 농사꾼들에게 쏟아부은 42조원은 고스란히 부채가 되었다.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실패해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은 격이었다. 임씨도 결국 구조개선자금을 받아 하우스 농사를 지었다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임씨는 홀로 농사를 짓는 어머니 박점수씨(62)를 도와 고등학교 때부터 들판에서 일했다. 임씨는 전문대를 다니며 도시 생활을 꿈꾸었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3대째 내려오는 땅을 지키기 위해, 군에서 제대한 1992년부터 진짜 농사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이 농사꾼으로서 자질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농사꾼이라면 8년 동안 땅 한평이라도 늘렸어야 하는데, 있는 땅마저 팔아먹고 8백만원이던 빚이 7천만원으로 늘었다." 이씨는 농사를 계속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자신 없어 했다.


부채 갚으려고 도시에 나가 막노동

사진설명 썩어가는 배추, 멍드는 농심 : 축북 충주시 살미면 박광선씨는 올해 배추값이 폭력해 7백만원을 빚졌다. 배추는 지금 염소 먹이가 되고 있다.

이씨의 부채가 늘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다. 정부의 농어촌구조개선자금을 받아 지은 비닐하우스에서 그는 오이와 호박이 아니라 빚만 키워 왔다. 오이와 호박 출하량은 늘었으나 하우스 연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특히 지난해 15kg 한 상자에 3만5천원 하던 오이값이 올해 절반인 1만5천원으로 폭락하고 기름값은 올라 이씨는 연료비를 더 대지 못했다. 이씨는 결국 지난 12월9일 난방 스위치를 내려버렸다. 지금 임씨의 천평짜리 대형 비닐하우스에는 출하를 앞둔 오이와 호박이 그대로 매달린 채 시들고 있다. 그가 12월에 갚아야 할 이자는 5백만원이다. 농사를 시작할 때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내가 기른 농산물을 최고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이제 '생산비라도 건졌으면 좋겠다'로 바뀌었다.

도시에 살다 농촌에 뿌리를 내려 보겠다고 귀농한 젊은 농사꾼들의 좌절은 더욱 깊다. 귀농하며 세웠던 계획이 엉망이 되는 데는 1∼2년이면 충분하다. 귀농자들은 도시에서 살아 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농사짓기가 얼마나 힘든지 더욱 실감한다. 귀농 1년 만에 다시 도시로 떠나는 탈농자도 늘고 있다. 농림부 통계에 따르면 1997년 1천8백41가구, 외환 위기 이후 1998년 6천4백9가구가 귀농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1999년 한 해에만 2천3백 가구가 이삿짐을 싸 다시 도시로 떠났다.

신한철씨(44)는 1997년 4월 충북 음성군 용산리로 귀농했다. 현대건설 전기기사로 8년 동안 근무한 뒤 2천만원을 들고 귀농한 신씨는 3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2천2백만원을 빚졌다. 신씨는 그 흔한 경운기 한 대도 없다. 빚을 지지 않기 위해 폐가를 빌려 살았고 땅도 소작을 했다. 그런데도 신씨는 지난해 고추값이 떨어져 부채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농촌 출신이어서 농사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내가 생각했던 농촌은 사라졌다. 큰 오산이었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귀농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신씨는 부채를 갚으려고 충주로 막노동을 나간다. 농사 지어서는 이자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씨는 올해 60일 동안 막일을 해 일당 6만원씩 3백60만원을 벌었다. 그러나 건설업 경기가 침체해 요즈음은 일자리도 없다. 현대건설 다닐 때 연봉 3천만원 이상을 받았던 신씨는 12월 말까지 이자를 갚지 못하면 신용불량자로 전락한다.

건강한 몸 하나만 믿고 귀농했던 신용조씨(35)도 농사를 지을수록 빚이 늘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깨달았다. 경희대 86학번으로 이른바 386세대인 신씨는 농민운동을 하려고 농촌에 투신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1994년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에 정착한 신씨는 마을 선배 3명과 협업을 했다. 부채를 줄이기 위해 시설 투자도 꺼린 신씨는 논농사만 2천5백평을 짓는다. 농기계 구입비도 절약하려고 협업하는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농기계를 구입했다. 이앙기와 건조기만 구입한 신씨는 농사철에는 협업자들과 공동 경작을 한다. 그는 도지를 빼고 올해 1천5백만원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신씨의 손에 남은 돈은 그가 흘린 땀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앙기와 건조기를 구입하려고 농협에서 빌린 대출금과, 단지 젊다는 이유로 받았던 후계자 지원금 등에 대한 이자만 천만원이 넘는다. 신씨는 "농사 짓고 나서야 실감했다. 농업 수익률이 3.5%인데, 농협에서 제일 낮은 이자가 5%다. 5% 이자를 꼬박꼬박 갚기도 버거운데, 11%짜리 이자까지 갚으려면 등골이 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장 내년부터 후계자 지원금을 상환해야 한다. 신씨는 매년 6백50만원씩 상환해야 하는데, 한 해 농사 지어 원금을 상환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그래도 그는 농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아르바이트 농사'를 지으며 버티고 있다. 소작을 주지 않고 직접 농사를 짓는 나이 든 노인들의 모내기나 추수를 기계로 대신해 주고 올해 8백만원을 벌었다.

이들처럼 2∼3년 경력의 초보 농사꾼도 빚을 지기 시작하면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이자마저 갚지 못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또 대출을 받아 급한 빚부터 갚아야 한다. 연체하면 신규 대출을 못받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땅이 없는 이들은 대출을 받으려면 비슷한 처지인 사람과 서로 연대 보증을 서는 수밖에 없다. 농가 부채 연대 보증은 거미줄처럼 얽혀 젊은 농사꾼들의 목을 죄고 있다.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기에 농협에서 빚을 내고, 열심히 농사 지어 갚으려 했지만 이자도 못갚는 현실 앞에 젊은 농사꾼은 절망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파산하면, 믿고 보증을 선 동료들마저 빚더미에 짓눌리기에 버틸 수밖에 없다. 특히 대도시 근교 전업농들의 연대 보증 문제는 심각하다.


농민 목 죄는 연대 보증 올가미

대구 동남쪽에 위치한 경산시는 축산 농가와 과수원이 많기로 유명하다. 대도시 근교여서 경산시에는 유난히 젊은 농사꾼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지역보다 더 심한 연대 보증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

사진설명 늘어만 가는 주름살 : 농가 부채로 동생을 잃은 이복덕씨. 이씨 또한 3천만원 빚을 안고 있다.

영남대와 부산대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한 천호준씨(46)는 4대째 이어온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1985년부터 농사를 지었다. 한때 '프로 농사꾼'이라고 자부했던 천씨는, 이제는 죽지 못해 한스러울 뿐이라고 자조한다. 천씨는 당장이라도 농사를 그만두고 싶지만, 자신이 무너지면 온 마을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경산시 와촌면 용천리 새마을지도자인 천씨는 사과 농사를 하다 축산으로 전업했다. 구조 개선 차원에서 축산 전업농으로 대규모화하면 지원해 준다는 정부의 권유에 솔깃해 그는 젖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축사를 더 짓고 30마리였던 젖소를 1997년에 1백30마리로 늘렸다. 그러나 그에게 농어촌구조개선자금은 농어촌 해체 자금이나 다름없었다. 3백만∼4백만 원 들여 산 젖소 값이 1998년 평균 80만원으로 폭락했다. 그 바람에 천씨는 축협 빚만 4억원을 졌다. 연대 보증을 서준 빚도 4억원 가량 된다. 천씨는 자신의 빚만 해결된다면 농촌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전농 경산시 농민회장 백철재씨(43)는 농가 부채가 해결되지 않으면 젊은 농사꾼은 줄지어 농약을 마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하지 않고 빚을 졌다면 억울하지 않겠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빚만 는다"라며 성토했다. 백씨는 이제 농사꾼은 파산을 선언하고 노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농민의 처지에서 농민을 위하는 농업정책을 펴달라고 했다. 그러나 백씨는 12월13일 농가 부채에 대한 여야 합의안을 접하고 또다시 좌절했다. 그는 농민회원들과 박재욱 한나라당 지구당 사무실을 오후 2시부터 점거했다. "농가 부채 해결하라." 목이 쉬게 외쳐도 지겹지 않은 듯 그는 외치고 또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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