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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꿈 그리는 사람, 꿈만 먹고 살아라?

노순동 기자 ㅣ soon@e-sisa.co.kr | 승인 2001.03.29(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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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터, 중노동에 쥐꼬리 임금…자격증 논란까지 불거져 '착잡'

사진설명 헝그리 애니 정신 : 애니메이터는 보통 동화맨으로 입문한다. 보수는 적지만 배운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단계다. ⓒ시사저널 이상철

"꿈짝 없이 철야네. 아침에 나갈 물량이 있는데." 식사를 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임수민 감독은 난감한 표정이다. 소주 몇 잔에 금방 얼굴이 불콰해졌고, 충혈되어 있던 눈이 더 붉어졌다. 일본으로부터 하청을 받아 일하는 임감독은 경력 5년차 애니메이터다. 두 시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지하 작업실에는 휘하 동화(動畵)맨들이 그린 그림이 수북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요즘 애니메이션만큼 팡파르가 크게 울리는 곳도 드물다. '머리 없는 몸통은 이제 그만' '디지털 기술로 경쟁력을 갖추자' 같은 소리가 요란하다. 덩달아 관련 학과도 상종가다. 올해 신입생을 뽑은 학교가 2년제 대학을 포함해 무려 45곳에 이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과의 경쟁률은 33 대 1이다.

구호가 요란할수록 소외감은 깊다. 업계에는 애드벌룬이 떠 있지만 정작 애니메이터들의 현실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인건비가 싼 중국·필리핀·베트남으로 하청이 빠져나가 일감이 줄어들면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초기 작업인 동화 물량의 감소가 심각하고,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채색과 촬영 과정의 수작업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임감독의 고민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임씨는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뒤늦게 애니메이션에 뛰어들었다. 부모의 반대 때문에 포기했던 그림에 대한 미련이 접히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이 서른에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5년 만에 감독이 되었다. 감각이 좋은 데다 여자 만나는 시간조차 아까워할 만큼 일에 매달려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한 달에 스무 날 이상 '날 밤을 까야 했던' 서울 신림동 시절을 마감하고, 이제 막 방배동으로 옮긴 참이다. 여전히 한 달에 절반은 회사에서 지새운다. 그렇게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1백50만∼1백70만 원. "이 일을 계속하면 다른 사람처럼 사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2대 독자여서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성화인데, 어떻게 결혼을 꿈꾸겠는가?" 그는 요즘 다섯 가지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몸에 고장이 잦지만,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다. "학원 동기 40명 가운데 고작 2명이 남았다. 특히 지난해에 썰물이 빠지듯 했다."


당국 지원 늘어도 애니메이터에게는 '그림의 떡'


한국의 애니메이션계는 꿈을 먹고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에게 '그래, 꿈만 먹고 살아라'고 강요해온 격이다. 애니메이터들의 노동 강도는 '바깥'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선다. 작업이 원화-동화-채색-촬영으로 이어져 일단 발동이 걸리면 컨베이어 벨트에 묶인 꼴이된다. 밤샘 작업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동화 단가는 장당 5백∼7백 원, 원화는 피트당 8천∼만원으로 10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작업실 한켠에 놓여 있는 스티로폼이 그대로 침대가 되고, 겨울에는 헤어 드라이어로 언 손을 녹여가며 일하기도 한다.

그렇게 일을 해도 일할 맛이 나던 때가 있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던 1960년대 후반과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 시기를 전후한 1980년대 중 후반이다. 날 밤을 새우기는 해도 월 4백만∼5백만 원씩 받는 스타급 감독도 생겼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답보 상태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IMF 위기 때는, 하청을 받아 수출을 많이 하는 구조에서는 환율 덕분에 단가가 오를 법도 했건만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낮아졌다. 게다가 추산에 따르면, 일본이나 미국이 한국보다 인건비가 더 싼 동남아 시장에 눈을 돌리면서 1998년에 기존 물량의 40%가 빠져 나갔다. 심지어 한국 회사가 일본에서 주문을 받아 다른 나라로 재하청을 주는 사례도 생겼다. 그런 구조를 택하면 결국 한국이 제작한 꼴이 되어 한국 애니메이터의 능력과 자질만 의심받게 된다.

당국의 지원이 늘었다고 해도 애니메이터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사주의 배나 불리고, 학원이나 대학 좋은 일 시켜 주고 있다는 불신이 깊은 것이다. 현재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했던 애니메이터 김 아무개씨는 '돈을 그렇게 쏟아붓고도 겨우 그 정도냐'는 핀잔을 들을 때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 작품 보면서 제일 마음 아픈 게 누구인지 아는가? 언론에 보도되는 액수대로 작품에 투자되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리 없다. 극장용 장편을 하면서 텔레비전용과 다를 바 없는 조건이었다. 제작 기간도 알려진 것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김씨는 "사주들이 받은 돈을 빼돌리거나, 합작을 합네 해놓고는 파트너의 돈만 투자하고 자기 보따리는 풀지 않는다. 애니메이터의 피땀으로 그들은 건물을 사들인다"라고 말했다.

'현장 따로, 정책 따로'인 현실에 가슴앓이를 하던 애니메이터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일이 생겼다. 애니메이터 자격증 제도를 신설하겠다는 방침이 나온 것이다. 산업인력관리공단(관리공단)이 실무 작업을 추진했던 이 제도의 목적은 인적 인프라 구축. '관련 대학 졸업자와 현장 경험 5년 이상 실무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자격증을 주겠다'는 것이 골자다. 바깥 사람들이야 '과연 시험으로 애니메이터의 자질을 따질 수 있을까' 따위 의문을 품는 것이 고작이지만, 애니메이터의 입에서는 단박 '누구 좋으라고?'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자격증 제도 신설 방침에 "누구 좋으라고?"


사진설명 디지털 코넌 대표 권오봉씨 : "기획력은 떨어져도 제작 노하우가 풍부한 세대와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사저널 윤무영

시행안을 짜던 노동부는 진퇴양난이다. 계획대로라면 올해부터 시행해야 하지만 반발이 거세 주춤하고 있다. 관리공단은 "단체 가운데 한 곳은 반대했고, 한 곳은 우리의 자문에 응했다. 모두 반대한다면 우리가 왜 하겠는가"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문화관광부는 원래 회의적이었고, 경영자를 대표하는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도 현장에서 실효가 없다고 판단해서 공식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 터였다. 관리공단측에 보고서를 제출했던 한국애니메이션예술인협회(한애협)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한애협 관계자는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공단이 업계 바깥에 용역을 의뢰하겠다고 해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현실을 아는 우리가 안을 짜는 것이 낳겠다 싶어서 응했다.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노동조합(위원장 류재운) 부설 세종애니메이션 연구소 이종찬씨는 자격증 논란이 '시험을 관리해 돈과 권력을 쥐게 될 사람들의 짬짜미가 낳은 촌극'이라고 말한다. 빅 뱅을 연상케 할 정도로 관련 학과가 난립하면서 내실 있는 교육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제 매년 3천명씩 대졸 애니메이터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자격증이 자질을 거를 수 있는 장치가 될 성싶은가? 어차피 현장에서는 재교육을 해야 그 인력을 소화할 수 있다. 학원과 대학에 몸 담고 있는 어중이떠중이 교수 인력에게만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요즘 그는 한 대학이 자격증 제도를 기정 사실화해 학생 모집 공고를 낸 것을 보고 공정거래위원회에 허위 광고로 고발했다.

애니메이터들이 자격증 제도에 냉소적인 까닭은 '증'이 신설된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풍토에서는 처우 개선으로 이어질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서다. 애니메이터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을 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애니메이션노동조합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현재 퇴직금 청구 소송이 5∼6건 진행되고 있다. 비정규직에게도 보험을 보장하고, 자유 계약 형식이라고 해도 실질적으로 근로 감독을 받으며 직무를 수행한 경우 근로자임이 인정되어 퇴직금이 발생한다는 노동부의 유권 해석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이 사안은 사주들에게도 쉽게 밀릴 수 없는 싸움이 되고 있다. 컬러부 직원 10명이 퇴직금을 청구한 예손 스튜디오는 노동부가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는데도 회사가 버티는 바람에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다. 퇴직자 10명 가운데 한 사람인 송남순씨는 배신감을 토로했다. "지시가 떨어지면 비상 대기했다. 스케줄 바쁘다고 하면 옆 사람을 꼬집어 가며 일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제는 악만 남는다."

회사측은 회사가 근로 감독을 지휘해 왔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야근할 때 식대를 3천원씩 일괄 지급하고, 밤샘 수당을 바로 다음날 현금으로 쥐어주던 관행까지 부인했다. 송씨는 "매월 월급이 나왔고, 사번까지 있다. 함께 소송을 하고 있는 동료들은 모두 이 곳에서 2∼5년씩 근무한 사람들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한호흥업·서울무비 등 한다 하는 기업들도 비슷하게 소송에 휘말려 있다. R.D.K에서 5년 동안 근무하다 지난해 12월 퇴사한 배성희씨도 마찬가지다. "보장 못받는 걸 당연히 여기고 누가 오면 오나보다 가면 가나보다 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3월 초 노동부에서 퇴직금 6백70만원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확정했으나 아직까지 회사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다. 회사의 처우에는 진절머리가 났지만 배씨와 송씨는 일이 참 좋았다고 말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즐기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을 것이다."


야근한다고 사장이 형광등 빼가기도


아예 일이 싫다면 쉽게 떠났을 것이다. 애니메이터들은 애꿎은 열정을 탓하며 자기 발등을 찍고 있다. '애니메이션 하던 여자가 애니메이션 하는 남자랑은 죽어도 결혼 못하겠다고 핸드폰 번호 바꾸고 도망가지 뭡니까. 직장 의료보험도 안되고, 결혼해도 돈 한푼 대출받을 수 없죠. 한숨 쉬면서 만든 애니메이션이 어찌 재미있고 질 좋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손재주가 원망스럽습니다.'(나두몰러) 노동조합 게시판에 오른 사연이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는 학생도 마찬가지다. "겁이 난다. 자격증까지 생긴다니 더욱. 학교가 애니메이션계를 축소해 놓은 것 같다. 정부나 업계나 '헝그리 애니 정신'을 외치는 듯하다. 죽어라고 그려 봤자 밥값도 나올까 말까다."

애니메이터 한 아무개씨는 아예 '시궁창'이 되었다는 극언을 퍼붓는다. "서울 회사의 분점이 춘천에 세워졌는데, 사장이 애니메이션의 생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야근한다고 핀잔을 주더니, 어느 날 술 먹고 작업실에 와서 욕설을 하고 형광등을 빼어가 버렸다. 지원하려면 똑바로 알고 주라." 성실하게 일해온 회사도 창작을 소홀히 한 채 하청으로 돈벌이에만 급급했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지원이다 뭐다 붐이 만들어지니 뜨내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춘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은 단편 <고양이>를 기획한 프리즘커뮤니케이션 대표 김성민씨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모든 것이 거품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외형에 집착해 덩지 큰 극장용 장편 계획만 펑펑 터뜨릴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용·비디오 등 소규모 작업을 통해 전문 인력을 거르고 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근 서울 목동에 들어선 문화산업지원센터 운영 방향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보고서는 방향 전환이 필요한 때임을 지적했다. (건물이나 고가 장비를 제공하는) 하드 웨어 중심에서 전문 인력을 지원하는 인적 지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진위의 제안은 기획 능력을 갖춘 감독급 고급 인력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고도의 숙련성을 갖춘 애니메이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 방치하다가는 '재주 있는 손발'마저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장편 극 애니메이션 <바리공주>를 준비하고 있는 박재동 화백은 "동선을 제대로 그릴 줄 아는 전문가는 의외로 드물다. 기획력과 숙련도 높은 애니메이터가 모두 부족하다"라고 아쉬워했다. 최근 기획자 모임을 제안한 디지털 코넌 대표 권오봉씨는, 한국의 애니메이터를 5세대로 구분하고 "기획력은 떨어져도 제작 노하우가 풍부한 4세대와 신진 5세대를 함께 활용해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대안은 애니메이터 재교육이다. 싼 맛에 컴퓨터에 능한 신참을 쓸어다 쓰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숙련된 인력을 재교육하자는 것이다. 10년 전부터 일본의 전문 제작사 매드하우스와 거래를 맺어 오다 최근 창작 영화 <어린 왕자>에 착수한 DR 디지털은 그런 점에서 모범적이다. 디지털 작업이 기존 인력을 활용하고, 일본 기획팀의 협조를 얻어 차근차근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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