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재산권 '총체적 혼란'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1.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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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도둑질'은 일상화…
'아날로그 법'으로는 '디지털 불법' 규제 못해


지난 3월 초, 단속반이 서울 돈암동 대학가 복사점을 급습했다. "대학 교재 불법복제 단속 나왔습니다." "영장 갖고 왔어요? 이건 업무 방해입니다." 한쪽에서는 주인이 몸싸움까지 불사하며 경찰을 막아섰고, 또 다른 쪽에서는 복사업소 직원이 절단기로 복사물을 잘라내고 있었다. 벽면 귀퉁이에는 〈경영학원론〉 〈회계이론〉 등 불법으로 복제한 교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3월 중순, 제보를 받은 경찰이 서울 남가좌동의 한 건물에 들어서자, 루이뷔통 문양이 박힌 가방과 핸드백을 만들던 직공들이 후다닥 뛰쳐나갔다. 경찰과 건물 안 사람들의 몸싸움이 한바탕 벌어졌다. 상황이 진정된 후 공장 안을 둘러보니 상표부터 디자인까지 진짜 루이뷔통과 꼭 닮은 제품들이 가득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수사3계 김선형 주임은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 단속반이 사무실에 들어서면 갑자기 회사 전체가 술렁거린다. 문을 걸어 잠그며 '영장 갖고 오라'고 큰소리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단속반이 아래층 컴퓨터를 검사하는 사이에 위층에선 직원들이 잽싸게 컴퓨터를 포맷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김주임이 단속한 회사 가운데는 이른바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는 업체에서조차 정품 소프트웨어가 단 1개도 나오지 않은 경우도 있다. 컴퓨터 50여 대가 전부 불법 복제품으로 운용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이다. '불법 복제와의 전쟁'으로 한바탕 회오리가 일고 있다. 당국은 3월 초부터 지적재산권 침해 풍토를 뿌리 뽑겠다며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기업은 불법 소프트웨어, 대학가는 출판물 불법 복사, 유명 상표 모조품 판매 상인들은 상표권 도용, 길거리 CD 좌판은 불법 복제 단속에 바싹 긴장하고 있다. 법정에서는 MP3 파일 공유를 둘러싼 소리바다와 음반회사의 줄다리기를 비롯하여 각종 지적재산권 침해 사건들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정부가 지적재산권 보호에 적극 나선 까닭은 최근 지적재산권이 무역 전쟁의 주요 테마로 떠오르고 있는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65쪽 딸린 기사 참조).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지식·기술·정보와 같은 무형 자산이 개인과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는 인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지적재산권을 보호해 창작과 기술 개발 풍토를 조성하지 않고서는 국가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문화관광부에서 오랫동안 저작권 관련 업무를 담당한 국립국악원 임원선 과장(국악진흥과)은 "보상이 없는 창작은 거의 없다. 기술과 지식이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지적재산권이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불법 복제 저작물 규모, 연 1천5백억원




그러나 한국은 지적재산권 침해가 공공연히 일어나는 '불법 복제 천국'이다. 지난해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SPC)가 국내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절반 이상(54.96%)이 불법 복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복제전송권관리센터는 해마다 국내에서 무단 불법 복제되는 저작물의 규모가 연간 1천5백억원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대학생 77.5%가 불법 복사본 교재를 사용하고 있고(한국출판연구소 자료), 불법으로 판매되는 음악 CD나 테이프가 전체 음반 판매량의 20%를 차지하고 있다(한국음반산업협회 자료).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 단속 기간에 일부 벤처 기업이 문을 닫고 업무를 중단했는가 하면, 밤에 출근하는 '올빼미족'이 등장했다고 한다. PC방이나 아파트 등지에서 몰래 업무를 보기도 하고, 단속에 대비해 컴퓨터 하드를 지우다가 '피땀 흘려' 개발한 제품 아이디어가 물거품이 되었다고 토로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불법 복제품이 난무했던 용산 전자상가는 단속 기간 내내 한산했다. 단속을 피해 상인은 물론 고객까지 '잠수'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단속 기간에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200%까지 매출이 급증했다.


출판물 불법 복제 단속 바람이 몰아치기 전만 해도 대학가 전문 복사업소에서는 학생들로부터 단체 주문을 받아 책 전체를 복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부 업소는 주문만 현장에서 받고 야간이나 휴일을 틈타 변두리에 있는 시설에서 은밀히 복사본을 만들기도 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장영태 계장(기획사업부)은 "100명이 듣는 강의 교재의 경우, 복사에 필요한 한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반품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국내의 대표적인 외서 수입 유통업체가 영문 서적을 대량으로 불법 복제하다가 미국출판협회에 고소된 사례도 있다.


음반 역시 불법 복제의 온상이다. 길거리 테이프 판매상이 쇠락한 뒤에도 불법 CD 판매상은 성업하고 있고, 서울 압구정이나 신촌에는 최신 곡을 CD에 구워주고 만원씩 받는 신종 판매업자까지 등장했다. 패션도 마찬가지. 여성들이 입고 들고 담고 걸치고 다니는 '명품'은 대부분 가짜이다.


온라인에서는 지적재산권을 '도둑질'하는 일이 더 쉽고 광범위해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다. 와레즈 사이트에서는 시중에서 고가에 판매되는 소프트웨어를 원하는 만큼 '공짜로' 내려받을 수 있고, '소리바다'와 같은 P2P를 이용하면 신곡 MP3도 몇 분 만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북미 지역에서 80만장이 판매된 타프시스템의 게임 소프트웨어


〈대물 낚시광〉은 한국에서 10만장밖에 팔리지 않았다. 와레즈 사이트에서 2천건 이상씩 유통된 '공'이 크다. 미국에서는 MP3뿐 아니라 DVD 영화를 실제 용량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에 화질과 음질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여 복제한 DivX가 탄생하고, DVD 소프트웨어마다 붙어 있는 복제 방지용 암호 해독 방법이 공개되어 비디오 파일도 MP3 못지 않게 무단 복제될 판이다.


그러나 온라인에서의 지적재산권 무단 복제 및 공유는 현행법으로 규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저작권법으로는 시시각각 발전하는 디지털 세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소리바다 사건을 놓고 공방이 벌어지는 것도 현행 법규로 판단하기에는 애매하기 때문이다.


한켠에서는 '카피레프트 운동' 벌어져




지적재산권이 과도하게 행사되어 발생하는 문제에서도 아날로그의 법은 무디다. 예컨대, 노래방 서비스를 둘러싼 음악저작권협회와 노래방기기 업체의 마찰이 대표적이다. 노래방 매체가 노래반주기에서 플래시 메모리와 CD롬으로 바뀌자 음악저작권협회는 노래방 기기업체에 추가 사용료를 내라고 요구했다. 이전에는 서비스 매체에 상관없이 한 곡당 56만원씩 저작료를 지불했는데, 반주기 모델과 서비스 매체에 따라 저작료를 따로 지불하라는 것이다.


태진미디어의 경우 음악저작권협회가 요구한 대로 저작료를 산출해 보니 7백60억원이나 내야 한다. 태진미디어 이상민 과장은 "그 돈을 지불하고 어떻게 노래방기기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당혹스러워했다. 이 문제는 현재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서 조정을 받고 있다.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최경수 실장은 "자기 이익만을 우선하는 저작권자도 태도를 바꿔야 한다. 사용료를 받으면 그에 맞게 이용자에게 서비스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디지털 시대의 지적재산권이 표류하면서 한편에서는 카피레프트 운동(저작권 공유 운동)을 확산해 정보 공유가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네트워크센터·공유적지적재산권모임 등은 현재의 지적재산권 제도가 특정한 생산자에게 모든 권리를 독점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일반인의 정보접근권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오병일 사무국장은 "정보와 지식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경험과 노력에 의해 체득한 사회적 자산이며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이용되고 수정 보완되면서 사회적 자산으로 환원된다"라고 주장한다.


특히 삼성전자가 소유한 인터넷 원격 교육 방법 특허처럼 디지털 관련 지적재산권은 인터넷이 자유롭고 풍부하게 발전하는 것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 오씨는 지적재산권을 과도하게 보호하기보다는 카피레프트 운동을 확산해 더 많은 사람이 새로운 정보와 기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부와 법의 몫이라고 말한다. 저작권 공유가 가능한 리눅스와 같은 프로그램이 활성화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이나 캠페인을 마련하는 데 정책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64쪽 딸린 기사 참조).


일련의 상황을 볼 때 한국은 지금 '지적재산권 딜레마'에 빠져 있다. 권리자나 이용자 모두 법의 테두리와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법은 그들을 조정할 잣대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결국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지적재산권 관련 법안이 정비되고, 지적재산권 보호와 법의 테두리에 적합한 정보 공유 운동을 확산하는 캠페인과 교육이 이루어져야 이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 사장(안철수연구소) 말대로 정부는 이벤트성 단속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지적재산권 홍보를 통해 국민 의식을 전환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법 개정 놓고 문광부·정통부 '소모전'




그러나 정부는 소모적인 부처간 다툼만 벌이고 있어 여론의 빈축을 사고 있다. 지난해부터 저작권법과는 무관한 정보통신부가 몇몇 국회의원을 등에 업고 '디지털 컨텐츠 법'을 개정한다고 들썩이자, 문화관광부는 3월30일 '저작권법 전면 개정안'을 갑자기 발표했다. 문화관광부는 이 개정안에 디지털 정보의 유통과 관리에 관한 기준이 담겨 있기 때문에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개정안이 발표되자마자 내용의 타당성에 관한 논란은 물론이거니와 개정안 마련 과정을 놓고 비판이 일고 있다. 정보통신부의 한 관계자는 디지털 컨텐츠 법을 반대하던 문화관광부가 정통부 추진안을 훔쳐보고 저작권법 개정안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저작권 전문 변호사 박성호씨는 "디지털 정보의 유통과 관리를 저작권법이 다뤄야 하는 것은 옳지만, 정통부에 맞불 놓겠다는 심산으로 느닷없이 개정안을 언론에 발표하는 것은 졸속 행정과 다르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인터넷 경제의 핵심은 저작권법에 있는 만큼 특정 부서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정보 유통에 관한 하드웨어를 담당하는 정통부와 여타 지적재산권 업무를 관장하는 특허청·산업자원부 등과 차근차근 논의해서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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