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신기록 행진, 그 이후
  • 노순동 기자 (soon@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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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관객 점유율 50% 눈앞…
수출 급증 '외화', 독자적 미학 '내빈'


지난 8월19일 〈무사〉 시사회가 열린 서울 시내 한 극장. 제시간에 도착한 기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좌석 8백 개가 이미 다 찼던 것이다. 행동이 굼뜬 기자들은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2시간40분을 견뎌야 했다. 관계자는 "몰릴 것을 감안해 가장 넓은 극장을 골랐는데…"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70억원에 이르는 제작비, 중국 올 로케이션 촬영, 반년에 이르는 후반 작업으로 기대감이 한껏 고조된 탓이기는 했지만, 이런 풍경은 한국 영화가 개봉될 때면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요즘 한국 영화는 흡사 한 편 한 편이 신기록 갱신에 나선 이어달리기 주자를 연상시킨다. 관객은 덩달아 응원군이 된다. 올해는 응원전이 더욱 거세다. 내심 '이러다가 50%까지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이다.


한국 영화 '관객 점유율 50%'는 허튼 계산이 아니다. 〈친구〉(연출 곽경택)가 8백20만명을 기록하면서 가뿐히 장외 홈런을 날린 데 이어 〈신라의 달밤〉(연출 김상진)과 〈엽기적인 그녀〉(연출 곽재용)가 총 8백만명을 동원한 마당이다. 이미 40%는 훌쩍 넘긴 셈. 가을은 전통적으로 한국 영화가 비교 우위를 점하는 계절인 데다 개봉 대기작의 면면도 듬직하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와, 강제규 필름이 중년 관객을 겨냥하고 만든 〈베사메무쵸〉가 9월1일 개봉하는 것을 필두로 〈봄날은 간다〉(연출 허진호) 〈화산고〉(연출 김태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연출 장선우) 〈마리 이야기〉(연출 이성강) 등 굵직한 대작 영화 네댓 편이 하반기에 포진하고 있다.


한국 영화가 1999년 〈쉬리〉에 힘입어 가까스로 관객 점유율 30%대에 진입했음을 돌이켜 보면 격세지감이다. 한국 영화는 1993년 초반 15.9%로 바닥을 친 뒤 줄곧 20% 언저리를 맴돌았다. 10년도 안 되어 지옥에서 천당으로, 한국 영화 최고 전성기의 활력을 되찾은 것이다. 세계에서 자국 영화 점유율이 25%를 넘는 곳이 미국·일본·프랑스·인도 등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세다.









연도 한국 영화
점유율
전체 관객수
(만명)
수출액(달러) 편당 가격(달러)



입장 수입 배분을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진 것도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반증한다. 그동안 한국 영화는 배급 수입의 50%를 극장측에 쥐어 주어야 했다. 외화는 40%다. '걸어만 주어도 고맙다'는 저자세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온 영화 제작자들이 한데 뭉쳐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영화도 돈이 되는데, 아니 한국 영화가 더 돈이 되는데.'


안팎으로 운때가 맞았다는 분석도 있다. '일등공신은 비실거리는 할리우드'라는 냉소는 지나치지만, 주변국 영화산업이 침체한 탓에 반사 이익을 누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홍콩은 스타들이 할리우드로 빠져나가면서 아시아 맹주의 지위를 잃었고, 일본은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할리우드도 최근 갈지자걸음이다. 시네마서비스 최용배 이사는 "할리우드가 제작비를 줄이느라 멜로나 코미디에 치중하면서 예전의 대형 액션물이나 SF물의 파괴력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국내 경기가 좋지 않은 것도 영화계로서는 호재였다. 마땅히 돈 쓸 곳을 찾지 못한 금융 자본이 빠른 현금 회전에 매혹되어 몰려든 것이다. 대기업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근심에 빠졌던 영화계는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돈은 넘치는데 영화가 없다.' 투자조합 가운데 하나인 아이픽처스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5∼6년 동안 운용하기로 약속한 영상투자조합이 13개 남짓이다. 돈이 많다는 소문은 일본 영화인들까지 들뜨게 하고 있다. 일본 영화계에 정통한 동국대 강사 정수완씨는 "그들이 합작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한국의 풍부한 돈을 함께 쓰고 싶어서이다"라고 지적했다.


한국 영화가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역설적으로 국내 시장만으로는 위기감을 느낄 만큼 제작비가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 60억원 이상 들인 대작은 네댓 편. 평균 제작비는 20억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국내 시장은 아직 충분히 개화한 상태가 아니다. 평균 다섯 편이 수지를 맞추고 열 편은 본전치기, 그리고 40여 편은 손해를 본다. 복합 상영관이 생겨 나면서 조금 늘어나기는 했지만 한국의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가 1.3회(2000년)에 그치기 때문이다. 미국이 5.5회. 프랑스가 3회, 영국이 2.4회이며 일본은 우리와 비슷한 1.2회 수준이다. 관람료도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이런 정황 때문에 그동안 나온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완성도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여도를 인정받는 것이다. 〈쉬리〉나 〈친구〉가 아니었다면 극장 나들이를 하지 않았을 이들을 불러내 시장을 키웠다는 말이다.


9월1일 개봉하는 두 영화가 모두 외국인을 위해 영어 자막을 마련한 것은 이처럼 해외 마케팅을 염두에 두면서 생겨난 새로운 풍속도다. 〈베사메무쵸〉는 호텔에서 리셉션을 열면서 영어 자막을 마련했고, 〈무사〉는 외신 기자 시사회를 따로 가졌다. 시초는 〈공동경비구역 JSA〉. 화면에 영어 자막을 넣은 것은 물론 시사회 때 통역까지 불러 외신 기자들을 배려했다.


실망스러운 일본 흥행 성적




해외 전문 배급사가 속속 들어서고,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는 외국 배급사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담당 부서를 꾸렸다. 지난해 〈비천무〉와 〈시월애〉 〈해변으로 가다〉를 판매한 시네마서비스는 올해 무려 60편을 내다 팔았다. CJ엔터테인먼트도 16편 정도를 자체 배급력으로 팔았다. 시네마서비스 문혜주 이사는 "개봉할 때 찾아와서 보기도 하고, 이전에 만든 작품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 일방적인 구매자에 머무르던 한국 영화계가 이제 막 세계 영화 시장에 공급자로 진입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CJ엔터테인먼트 해외마케팅팀에 따르면, 시장으로 의미가 있는 곳은 중국·일본·타이완뿐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57%, 2000년에는 무려 79%에 이른다. 언론에 보도된 수출고가 거의 전부인 셈이다.


'아시안우드'는 아직까지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무조건 내다 팔 생각만 하지 말고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은 더욱 귀를 기울일 만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은 비싼 값에 한국 영화를 사들였지만 대작 세 편을 제외하고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태백산맥〉 〈서편제〉 〈쉬리〉를 일본 시장에 풀었던 재일교포 배급업자 이봉우씨(시네콰논 대표)는 "시장에서 승산이 있는 작품은 몇 안된다"라며 거품을 경계했다.




지난해 일본에서의 흥행 실적은 실망스럽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미니멈 개런티 2백만 달러에다 극장 개봉 수입으로 2백만∼3백만 달러를 추가로 챙겼을 뿐 수익을 낸 작품이 드물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원 이은경씨에 따르면, 관객의 반응이 좋았던 〈8월의 크리스마스〉조차 6주간 상영되고도 흥행 수입이 적어 부족분을 일본 배급사인 판도라 사가 메워야 했다(일본의 몇몇 극장은 흥행 수입을 보장해야 작품을 건다). 시네마서비스 문혜주씨는 한탕주의를 경계한다. "무조건 비싸게 팔려 들지 말고 적정가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측 수입업자가 손해를 보면 판로가 막힌다." 관객의 반응이 좋으면 틈새가 생길 수 있다. 허진호 감독은 해외에서의 호평에 힘입어 한·일·홍콩 3국 합작으로 〈봄날은 간다〉를 만들 수 있었다.


중국의 잠재력은 더 크다. 베이징 전영학원 출신인 도성희씨에 따르면, 중국은 한국 문화에 호감을 품고 있다. 한국 배우도, 드라마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문이 제대로 열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중국 스태프를 고용해 〈무사〉 촬영을 진행한 조민환 프로듀서는 그들과 신뢰를 다진 좋은 기회였다고 자족한다. 그는 "중국 사람들은 친소 관계에 따라 인건비를 달리 요구한다. 세 가지 등급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친구' 등급을 적용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거품을 경계하는 사람들은, 내부의 위기로 눈을 돌린다. 가장 심각한 것은 독자적인 미학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월간 〈키노〉 편집장 이연호씨는 말한다. "한국 영화의 장르는 세 가지다. 울리든가, 웃기든가, 때리든가." 과거 중국 5세대나 6세대 감독, 그리고 이란 영화나 일본 영화가 국제 영화제를 통해 아시아 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떠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한국 영화의 몰골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기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산업 기여도와 상관없이 한국 영화계에 소중한 인물로 개성 있는 감독들이 다수 꼽힌 것은 이런 바람 때문일 것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다양성은 이제 한국 영화의 새로운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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