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땅이자 공포의 땅
  • 상하이·베이징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r)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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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년간 연평균 9%씩 성장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은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자 공포의 대상이다. 이 거대한 신흥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과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 기업들
중국 채소 샹차이(香菜)는 향과 맛이 독특해 외국인은 비위가 상할 때가 많다. 외국인이 샹차이를 즐겨 먹을 정도가 되어야 ‘이제 중국에서 제대로 사업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한다. 샹차이를 즐겨 먹는 한국 기업인들이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압축하는 표현은 ‘기회와 위협’이다.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44배이고 생산직 노동자 월 평균 임금이 8만~15만 원인 중국에서 한국 기업인들은 최적의 수출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또 잠재 수요자 13억이라는 소비 시장은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는 한국 대기업들에 ‘엘도라도’를 연상케 한다. 한국 기업들은 유럽·일본보다 뒤늦게 진입했지만 세계가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인들은 파죽지세로 성장하는 중국 경제와 불과 2.1년 차이로 좁혀진 한·중 기술 격차를 보고 위협을 느낀다. 중국 경제는 날고 한국 경제가 기는 양상이 5년만 지속되면, 한국 경제가 중국에 흡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창간 15주년 특별기획 ‘브릭스 속 한국 기업을 가다’ 두 번째로 ‘기회와 위협’의 거대 시장 중국 편을 싣는다.

상하이 푸둥(浦東) 국제 공항에서 빠져나와 고가도로를 달리다 보면 츠첸푸리처(자기부상열차)가 엄청난 속력(시속 430㎞)으로 추월한다. 고가도로 양쪽으로 솟아오른 마천루에 나붙은 광고판 사이로 LG전자와 삼성전자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상하이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황푸(黃浦)의 물결이 상하이를 푸둥과 푸시(浦西)로 나눈다.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를 조차한 영국인이 개발한 황푸강 서쪽 강가 외탄 지역에는 20세기 초 유럽식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지금 이 거리는 중국의 대형 금융기관이 입주하면서 중국판 월 스트리트로 변모하고 있다. 강 너머 푸둥 지역에는 89층 건물 진마오따사(金茂大廈)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구조물 둥팡밍주(東方明珠)가 버티고 서 있다. 밤이 되면 강 주변에 밀집한 마천루들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전세계 유명 브랜드들이 상하이의 밤을 밝히는 것이다.

상하이는 전세계 유명 브랜드의 각축장이다. 중국 현지 업체들과 비교해 기술과 품질에서 앞서는 한국 기업이 중국 시장을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은 오산이다. LG전자가 디지털 TV 시장에서 경쟁하는 브랜드는 중국 업체가 아니라 소니와 필립스다.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단말기 애니콜이 시장 쟁탈전을 벌이는 상대 역시 노키아와 모토롤라이다. 세계 최고의 품질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중국 시장에서 살아 남기 힘든 것이다. 전창수 LG전자 화동지구법인장은 “국제 도시 상하이는 세계 최고의 전자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전쟁터다. 철저한 시장 분석과 소비자 행동에 대한 이해, 제품개발력, 그리고 품질을 갖추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LG전자가 일본이나 유럽 제품보다 10% 가량 싼 가격으로 경쟁력을 확보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가격경쟁력만 내세우면 중국 업체 하이얼이나 창홍과의 경쟁에서 패퇴하고 만다. 한국 업체들은 품질에서는 세계 제일의 브랜드와 겨루고 가격에서는 중국 토착 업체와 경쟁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LG전자의 중국 선점 전략은 현지화다. 중국 현지 여행사 직원 방세영씨는 “LG전자를 중국 브랜드로 착각할 정도로 중국 소비자 사이에 스며드는 데 성공했다”라고 말했다. 상하이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사들이는 가전제품 전부문에서 LG전자의 실적은 눈부시다. 전자레인지는 중국 업체 갈란츠에 이어 시장 2위, 에어컨 4위, 세탁기 3위를 차지하고 있다.

LG는 현지화, 삼성은 차별화로 승부

LG전자는 현지화라는 목표에 맞추어 현지 인력을 중용한다. LG전자 중국지주회사가 고용한 인원은 2만9천5백명. 이 가운데 한국인은 3백84명에 불과하다. 상하이·장쑤성·저장성·안후이성 지역을 총괄하는 LG전자 화동사업부는 장쑤성과 안후이성 판매지사장 격인 분공사장에 중국인을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또 칭화(靑華)·베이징(北京)·후단(復旦) 등 중국 명문 대학 출신을 선발해 현지 사업을 이끌어갈 인재로 키우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차별화 전략에 치중한다. 삼성전자의 중국 전체 매출 가운데 50%를 차지하는 휴대전화 애니콜을 최고급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제품 가격을 높게 책정하고 광고에 서양 모델을 내세운다. 동시에 ‘삼성’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마케팅 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전자는 일선 사업부서와 별도로 브랜드 관리팀을 운영한다. 허기열 삼성전자 판매담당 전무는 “품질과 기술에서 현지 업체가 따라 오지 못할 정도로 앞선 제품을 출시하고 ‘삼성’을 유럽·일본 브랜드와 견줄 수 있는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프리미엄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자제품과 달리 중국 자동차 시장은 규제가 많다. 중국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려면 현지 업체와 합작법인을 설립해야 한다. 국가별 수입 쿼터를 책정한 탓에 직수입이 어려워 합작법인 형태로 진출하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죽의 장막’의 보호를 받는 중국 자동차 시장도 내년 초부터는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한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내년 초까지 자동차 시장을 완전 개방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현대·기아 자동차는 시장 개방에 대응하기 위해 올해 초 중국 전역의 대리점을 5개에서 14개로 늘렸다. 이종승 현대·기아 자동차 상하이사업부 수석대표는 중국 수입차 시장이 공급자 시장에서 구매자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만성적인 수요 초과 현상이 사라지고 공급 과잉을 걱정해야 하는 시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중국 자동차 시장은 합작법인이 주도한다. 폴크스바겐·GM·도요타를 비롯한 선진 자동차 업체들이 중국 현지 업체와 50 대 50으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현대자동차도 2002년 베이징기차투자공사와 합작해 베이징현대기차를 출범시켰다. 베이징 동북부 외곽에 있는 순이지구에 들어선 베이징현대기차는 23만평 대지에 연간 15만대 생산 라인을 갖추고 엘란트라(아반테XD)와 쏘나타를 출고한다.

베이징현대기차, 판매액 152.9% 상승

한국인 직원 61명이 중국인 2천7백여 명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베이징현대기차 순이공장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을 연상시킨다. 베이징현대기차는 추가로 15만대 생산 라인을 세우고 있어 내년 상반기에는 연간 30만대 생산 시설을 갖추게 된다. 베이징현대기차는 올12월23일에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투싼을 생산할 계획이다. 노재만 베이징현대기차 총경리(사장)는 “베이징현대기차는 미국 앨라바마 공장과 함께 현대자동차가 ‘글로벌 톱5’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중시하는 해외 생산기지이다”라고 말했다.

베이징현대기차는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판매 개시 2년 만에 중국 승용차 시장 5위에 올랐다. 지난 8월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28.2% 늘어났고, 8개월 판매 누계액은 152.9% 상승했다. 올해 초 출시한 엘란트라는 승용차 부문 판매 1위를 놓고 상하이따중(폴크스바겐 합작법인)이 생산하는 싼타나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LG전자는 중국 생산 기지와 중국 시장을 발판 삼아 세계 3대 전자업체로 성장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손진방 LG전자 중국지주회사 사장은 “중국은 LG전자가 ‘글로벌 톱3’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 거점이다”라고 말했다. LG전자는 전자 부문 계열사 투자액을 합해 중국에 24억 달러를 투자했다. 톈안먼 앞 장안가에는 서울 여의도 쌍둥이빌딩에 버금가는 LG트윈타워가 솟아오르고 있다. 내년 5월 완공되는 이 건물에 LG전자는 1억5천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만리장성을 넘어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기지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중국 15개 도시에 생산법인 20개를 운영하는 LG전자 중국지주회사는 올해 매출 목표 1백7억 달러를 달성할 전망이다. 광스토리지·전자레인지 등 주요 수출 품목의 중국 현지 생산 물량이 한국내 생산 규모를 넘어섰다. 한국에서 생산하는 물량이 많은 품목은 에어컨과 컬러TV밖에 없다. 판매 물량도 휴대전화 단말기와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품목에서 중국 시장 판매량이 한국 내수 시장보다 훨씬 많다. 전창수 법인장은 “지난 10년 동안 중국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세계 최고의 전자업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에게도 중국은 정보 기술과 통신 분야의 세계 최고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교두보다. 삼성전자 중국 법인은 지난해 중국 매출 1백4억5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연간 성장률은 29%가 넘는다. 지난해까지 삼성전자가 중국에 투자한 금액은 29억 달러. 중국인 고용 인원은 4만5천명에 이른다. 허기열 삼성전자 중국 마케팅 담당 전무는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전자업체와 경쟁하며 중국 디지털 제품 시장을 선도하는 업체로 성장했다”라고 말했다.

승승장구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무서워하는 업체는 소니나 필립스가 아니다. 하이얼·창홍·메이디 같은 중국 현지 업체들의 추격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전창수 LG전자 법인장은 “스타일링은 중국 기업이 거의 따라붙었다. 기술 수준만은 아직까지는 한국 기업이 앞서고 있으나 격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주요 가전제품 시장에서 중국 현지 기업들이 판매 1위를 차지하는 품목이 늘고 있다.

자동차 분야는 전자산업만큼 급박하지는 않다. 노재만 베이징현대기차 총경리는 “자동차 업체는 무엇보다 제품개발력을 갖춰야 하는데, 중국 기업들은 단순 조립 생산만 하고 있어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일찌감치 중국에 진입한 폴크스바겐·도요타·GM 등 자동차 업체들이 핵심 기술을 중국 합작 파트너에게 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기업들이 핵심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쌍용자동차나 로버자동차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므로 그들이 독자적인 자동차 개발력을 갖추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또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일부 자동차 업체들은 기술 이전을 약속하고 있다.

중국 R&D 투자액, 한국보다 많아

중국의 연구 개발(R&D) 투자액은 이미 한국을 추월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중국의 R&D 투자액은 1백56억 달러로 한국의 1백38억 달러보다 많다. 세계 60개국 중 R&D 투자 순위는 중국이 6위, 한국이 7위다. 또 잠재성장률을 결정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인 고정자산투자는 지난해 중국이 27.6% 늘었으나 한국은 2.3% 줄었다. 상용기술 분야 기술 격차는 2.1년으로 좁혀졌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이 갖는 공포는 엄살이 아니다.

중국을 용에 비유하면, 베이징이 머리이고 상하이는 여의주다. 황해 연안을 따라 급성장하는 10여 도시는 용의 발톱에 해당한다. 승천하려는 용이 세계 시장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발톱을 세우고 있다. 거대한 용이 대륙풍을 일으키며 세계 경제의 판도를 바꾸려 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미래는 대부분이 대륙풍에 달려 있다. 대륙풍은 순풍이 될 수도 있지만 한국 경제에 ‘황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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