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살인’ 숨은 범인은 언어 폭력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0.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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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ㆍ아들 상습 구타는 안해ㆍㆍㆍ성적에 과잉 집착
지난 3월15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여중생 살인 사건은 아버지의 가정 폭력이 빚은 비극이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폭력이 중학생 아들을 끔찍한 살인자로 내몰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보도된 것처럼 아들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피의자인 최민석군(15·가명)과 누나인 최 아무개양(18)은 아버지가 민석이를 때린 적은 없다고 밝혔다. 아버지 최 씨(52)도 “평생 아들을 때린 적은 딱 두번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또 민석이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타한 적도 거의 없었다고 검찰조사에서 진술했다.

대신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시고 ‘공부도 못하는 자식’이라고 고함을 치며 윽박질렀다. 민석은 그런 데서 중압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버지는 천안에서 큰 규모의 사업을 하다가 송사에 시달렸고, 결국 사업이 실패하자 아산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한때 위암으로 오래 투병한 어머니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민석이의 학업에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였다. 1998년 고등학교에 진학한 딸을 ㅇ시의 고등학교로 보내고 아들은 천안에 있는 중학교로 보낼 정도였다. 민석이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이런 열의에 보답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부학생회장을 지냈고,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명랑하고 착한’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민석군의 중학교 성적은 고등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민석이는 천안에서 ㅇ시로 온 다음부터 말이 없어졌다. ㅇ중학교 같은 반 친구는 “무서울 정도로 말이 없었다”라고 민석이를 기억했다. 그런 민석이는 서울로 오기 전에 담임 선생에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두 번이나 무단 결석을 하기도 했다.

“정신적 학대가 구타보다 나쁠 수도”

아버지는 결국 민석이를 3월2일 서울로 전학을 보냈다. 계속된 사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위해 급하게 서울로 전학시킨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편법으로 서울 홍제동의 임대 아파트를 빌렸다. 이 아파트에서 책상도 없이 민석이는 고교 진학을 준비했다.

민석이와 진학 상담을 했던 서울 ㅇ 중학교 박 아무개 교사는 “아이가 진학에 대한 열의가 있어 열심히 하면 잘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라고 말했다. 민석이는 일찍 등교해 4분단 맨 첫째줄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런 민석이가 채 보름이 안되어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의 폭언에 이성을 잃고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사건 후 민석이의 정신 상담을 맡은 정신과 전문의 김 아무개 박사는 “아이가 수년간 정신적 학대를 받았고 이는 물리적 폭력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김박사에 따르면, 아이가 만성적인 압박이나 학대에 시달리다 보면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특히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럴 때 충격을 받게 되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를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disorder)라고 하는데, 민석이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경찰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민석이는 평소 아버지가 미웠지만 아버지나 다른 누굴 해코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해, 범죄가 우발적으로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건 이후 병치레가 잦았던 민석이 어머니는 쓰러졌고 아버지는 가게 문을 닫았다. 누나는 민석이가 체포된 이후 학교에 나가지 않은 채 자퇴를 생각하고 있다. 3월27일 가족은 도망치듯이 ㅇ시로 이사를 떠났다. 부모는 검찰의 참고인 조사에도 두 차례나 응하지 않았다.

강북삼성병원 노경선 박사는, 자기 자식을 매일 학대하는 것은 아이의 뇌를 매일 걷어차는 것과 똑같다고 가정 폭력의 심각성을 경고한다. 그는 이 사건이 한 개인과 가족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라며, 민석이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보호와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화가 나면 “없어져야 할 ×” “너 죽고 나 죽자” 등과 같은 폭언을 무심코 내뱉는다. 전문가들은 욕설·차별·감금·협박 같은 정서적 학대가 계속되면 아이의 미래를 망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구타도 교육의 한 방법으로 정당화하는 분위기에서 유사한 사건은 또 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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