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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초점]대만의 선거 혁명 현장 리포트

타이베이/글ㆍ金鎭華 편집위원 사진ㆍ安熙泰 기자 ㅣ | 승인 2000.03.30(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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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이볜 총통만세! 우리는 해냈다! 천총통 만세!"

어떻게 54년 동안이나 참아왔던 것일까. 3월18일 개표 시작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타이베이 시민들은 손에 손에 깃발과 폭죽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천수이볜 새 총통의 이름을 연호하며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만을 통치해온 국민당 정권이 침몰하는 동시에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독재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시사저널>은 국제팀 김진화 편집위원과 사진부 안희태 기자를 현지에 급파해 대만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생생하고 숨가쁜 상황을 취재했다.“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만세! 우리는 해냈다! 천총통 만세!” 지난 3월18일 오후 6시께, 개표 시작 2시간 반도 안되어 군중은 일제히 깃발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민진당(民進黨) 앞 밍쉥 대로는 펄쩍펄쩍 뛰며 환호하는 군중, 폭죽 소리, 나팔 소리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개표가 65%밖에 안된 그 시각에 천수이볜 총통은 이미 탄생해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개표 완료를 기다릴 수 없는 절박한 심리 상황에서 천총통이 거리에 나타나 주기를 열광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민진당사 1층 회의실. 5백여 내외신 기자가 빽빽히 들어선 기자 회견장에 개표 완료 2시간 만에 나타난 천후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유세장에서 이미 대세 결판

“우리는 사랑과 희망으로 암흑과 공포의 시대를 극복했습니다.” 1당 집권 반 세기 만에 종지부를 찍고 천총통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기자 회견을 하는 한 시간 동안 그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가지런히 빗은 머리, 선거 유세로 검게 탄 얼굴, 잔잔한 미소와 낮은 투의 목소리, 상대방을 약간 무시하는 듯한 표정 없는 눈망울, 베이지색 점퍼 차림에 포도주색 넥타이, 담담한 모습. 모두가 그대로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회견을 끝내고 돌아서 나가며, 이마의 땀을 회색 손수건으로 훔쳐내는 모습뿐. 밖에서는 여전히 군중의 환호가 그의 목소리를 간간이 삼키고 있었다.
타이완 총통 선거는, 그 전날 밤 후보들의 마지막 유세장에서 이미 판가름이 나 있었다.

무소속 쑹추위(宋楚瑜) 후보의 유세장인 타이베이 시 경마장. 청년과 중?장년 남녀가 비교적 골고루 섞여 있었다. 당의 깃발도 없이 후보 사진이 들어간 깃발만을 치켜들며 열광하는 20만 시민은 대부분 중산층 냄새를 풍겼다. 오후 5시부터 밀려드는 청중의 열띤 함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타이완 성장 출신 쑹후보의 단조로운 연설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집권 국민당 후보 렌잔(連戰) 부총통은 마지막 유세장으로 당연히 장제스(蔣介石) 총통 기념센터를 택했다. 거대한 기념 건물들로 둘러싸인 넓은 잔디 운동장에는 10만 군중이 초저녁부터 몰려들었다. 40대 이상이 주류를 이루었고, 산뜻한 흰색 운동복에 운동 모자를 쓰고 있어, 한눈에 가난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일부는 동원된 듯했다. 해외 화교 단체 회원도 상당수 있었다.

저녁 9시반, 렌잔 후보가 리덩후이(李登輝) 총통과 함께 나타나자 폭죽과 레이저빔, 팡파르가 동시에 터졌다. 달변에 열변인 77세의 리총통은 ‘안정ㆍ번영ㆍ타이완인의 승리’를 외치고 있었다. 뒤이어 등단한 렌잔 후보의 연설을 듣던 외교학 전공 여학생 루이자는 “저 사람은 물처럼 색깔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렌잔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데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 “부모님 때문에 함께 오기는 했지만, 렌잔보다 리총통이 후보였으면 좋겠다”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밤 10시30분 타이베이 축구장. 천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벌어지는 축구장 3㎞ 전방부터 차량 출입이 통제되었다. 축구장ㆍ잔디밭ㆍ스탠드ㆍ지붕 위ㆍ처마 밑까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수용 인원 10만인 축구장에 백만명이 모였다고 주최측은 주장했지만 경찰측 집계는 40만이었다. 한눈에 서민과 젊은이가 많이 띄었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유세는 밤 11시에 나타난 천후보가, 선거법에 따라 자정에 연설을 끝냄으로써 막을 내렸다. 천총통 당선 일등공신은 주룽지?

“땅쉔!,땅쉔!땅쉔!” 함성이 운동장을 흔들었다. 군중의 표정과 눈빛은, 기어코 천후보를 땅쉔(당선)시키지 못하면 이 나라의 앞날은 없다고 호소하는 듯한 절실함과 절박함, 애원에 가까운 진지함을 쏟아내고 있었다. 앞서 가보았던 두 후보의 유세장에서 느끼지 못했던 강력한 열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천총통의 당선 축하 군중대회가 이튿날 새벽 5시까지 계속되는 가운데, 패배가 알려진 직후부터 국민당사 앞에서는 리총통을 규탄하는 격앙된 국민당원의 폭력 시위가 계속되었다. “리덩후이는 국민당을 팔아먹었다.” “리덩후이는 즉각 사임하라.” 가부장적 권력을 12년간 행사해온 리총통에게 달걀을 던지는 믿지 못할 장면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당원들은 이번 선거에서 2% 차로 석패한 쑹후보를 공천하지 않아 정권을 빼앗겼다고 분노했다.

민진당은 창당 14년 만에, 천후보는 정치 입문 11년 만에 중국의 침공 위협을 뿌리치고 54년간 지속되어온 국민당 정권을 침몰시켰다. 천후보의 지지 기반은 젊은층과 서민층이다. 그러나 승리의 막후에는 결정적 공로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 첫째가 천후보의 당선을 극력 막으려고 했던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천후보가 당선될 경우, 대만 침공도 있을 수 있다는 주룽지의 ‘협박’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국을 강타했을 때, 많은 시민이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며칠후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타이완인의 오기가 살아나, 마지막 순간에 천후보를 찍은 사람들이 많다”라고 민진당 린이시웅(林義雄) 당수는 기자에게 밝혔다. “쑹추위는 정신적 총통”

두 번째 공로자는 대만 중앙연구원 원장 리위안저(李遠哲)박사, 1986년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그는 타이완 태생으로 국민들로부터, 특히 개혁적 지식인으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연구원장 직을 사퇴한 그는 천후보 지지 성명을 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25%에 달하는 부동표 유권자의 5∼7%를 천후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 천후보 정책고문 샤오신 박사의 판단이다.

세 번째 공로자는 ‘지역 감정’이다. 쑹추위 후보가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율을 보인 데 비해 천후보는 고향인 타이완 남부 타이난 시와 남부 8개 현에서 몰표를 얻었다. 천후보 득표 수의 25%인 95만표가 이 지방에서 나왔다. 두 후보의 득표 차이가 31만 표임을 감안할 때 지역 감정이 천총통을 탄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최종 집계 직후 쑹후보 대변인인 친칭쉥은 쑹후보가 타이완의 ‘정신적 총통’이라고 주장했다.

쑹후보가 남부를 제외한 전국에서 천후보를 앞섰다는 사실과 그가 선거 불과 4개월 전 국민당을 이탈해 무소속으로 고군 분투해 당선 문턱까지 왔다는 사실, 또 중국 본토 출신으로 중국 당국과 과히 껄끄럽지 않은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그의 인기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앞으로 대만 정국이 천총통과 ‘정신적 총통’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국립정치대학교 우퉁혜 교수는 지적했다.

그밖에도 천총통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가장 큰 산은 이른바 양안 관계이다. 중국에 비친 천총통의 이미지는 ‘타이완 독립주의자’이다. 선거전이 가열되고 중국의 위협이 계속되자, 그는 독립의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양안 관계에서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스 메이커’가 되겠다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선거 태풍이 지나간 뒤 중국의 위협에 대한 시민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하다. “천총통이 더 이상 큰 소리로 독립을 말하지 않는 한 중국이 쳐들어오겠습니까?” 한때 타이완 독립 선언을 지지했다는 한 중년 세탁업자는 ‘현시점에서 독립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동조하듯, 천총통은 “만일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세 후보 자녀 중 군 징집 연령인 아들을 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자식 가진 부모의 걱정은 이해하고도 남는다”라는 말로 국민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최측근 브레인 샤오신 박사는 천후보가 과거 역설한 ‘타이완 공화국’이라는 단어는 이제 천총통으로부터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한때 ‘타이완 독립 만세’라는 녹색띠를 이마에 두르고 타이베이 시 한복판에서 시위하던 천총통에 대한 중국의 불신 이미지가 얼마나 바뀌게 될지 의문이다.

중국과의 긴장 관계가 계속되는 한 타이완의 정치ㆍ경제ㆍ사회 불안은 계속될 것이며, 주요 현안인 정치 개혁도 착수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천총통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개혁 의지 때문이다. 국민당 장기 집권이 낳은 부패와 부정, 정치와 검은돈의 유착을 어느 정도 신속히 파헤치느냐가 천총통이 집권 초기에 넘어야 할 또 다른 큰 산이다.

입법원(국회) 의석 2백24석 중 민진당 의석은 70석에 불과하다. 정치 개혁 입법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당은 물론 쑹후보가 추진 중인 신당(가칭, 대만봉사팀), 그리고 기존 신당과의 협력을 모색해야 할 판이다. 내각 구성도 초당적일 수밖에 없다.

렌잔 후보가 완패한 이후 일고 있는 국민당의 자중지란은 타이완 정국의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리덩후이 당총재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즉각 사퇴를 촉구하는 세력은 쑹후보의 당 복귀와 당권 장악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쑹후보가 신당 창당을 모색하다 한 발짝 물러난 것도 그같은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1백6년 역사의 국민당은 현재 2백만 당원과 방대한 전국 조직, 자금력을 가진 강력한 정당이어서 쉽사리 붕괴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쑹후보가 국민당 복귀 쿠데타에 성공한다면 천총통은 4년 뒤 총통 선거에서 이번보다 더 강력한 상대와 2차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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