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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양민 학살’ 진상 조사 착수한 미국

육군장관 “학살 밝혀지면 적절히 조처하겠다”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ㅣ 승인 1999.10.14(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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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9일 AP 통신이 서울발 기사로 이른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진상을 보도한 뒤,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해 쉬쉬하며 책임을 회피해 오던 미국 정부가 뒤늦게나마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 사건과 관련한 AP 통신의 보도 내용을 9월30일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해 듣고, 즉각 모든 가능한 자원을 동원해 진상 조사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코언 장관은 그 지시를 루이스 칼데라 육군장관에게 전달했다.

이에 따라 칼데라 육군장관은 9월30일 국방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AP 보도는 새롭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정보를 제공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국립문서보관서의 관련 문서들을 포함해 각종 군 사료에 대한 검토와, 생존 참전 용사 면담 작업 등을 고려할 때 진상 조사 작업이 최소한 1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AP의 첫 보도가 나온 직후인 9월29일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노근리 학살 행위에 미군이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이튿날 180° 바뀌었다. 무엇보다 여론의 거센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뉴욕 타임스>는 1면 중앙에 큼지막한 노근리 현장 사진과 함께 ‘미군들, 한국전 당시의 미군의 학살에 대해 털어놓다’라는 제목으로 AP 보도 내용을 그대로 전재했으며, <워싱턴 포스트>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도 1면 주요 기사로 취급했다. 또 CNN은 매시간 주요 뉴스로 이를 내보냈고, 전국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NBC 저녁 뉴스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직접 인터뷰해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뉴욕 타임스>는 3일자 사설을 통해, 미국 정부가 노근리 사건과 관련해 과거 공식 자료에만 국한해 조사하는 등 소극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국방부가 AP 통신 보도를 통해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반드시 답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또 뉴욕 대학 역사학과 메릴린 영 교수는 <뉴욕 타임스> 3일자 ‘편집국장에게 보내는 편지’ 난에서, 지난 50년 8월21일자 <타임> 기사를 인용했다. 그는 남한 피난민 행렬에 대한 무차별적인 발포 명령을 지시한 한 대대장의 명령 행위를 적시하며, 미군의 학살 행위가 노근리 한 곳에서만 자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전 매스컴이 반인륜적 행위의 대표 사례로 손꼽는 대량 학살 행위를 미군이 저질렀다고 난리법석을 피우자, 미국 정부도 엄청난 여론의 압력을 느꼈다. <2개의 한국> 저자인 돈 오버도퍼 씨는 “앞으로 미국 의회가 정식 거론할 경우, 노근리 사건은 클린턴 행정부에 커다란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거센 여론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AP 보도에서 드러난 당시 사건 관련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학살과 관련한 당시 미군 부대의 작전명령서였다. 이것이야말로 미국 정부가 그토록 부정해온 ‘미군 개입’의 확증이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노근리 학살에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미군 제1 기갑사단 소속 유진 헤슬먼·노먼 팅클러·에드워드 데일리 등 생존 참전 용사들은 하나같이 ‘그것은 한편의 도살극’이었다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냈다. 이들의 생생한 증언 앞에서 책임을 회피해 오던 미국 정부도 결국 두 손을 든 것이다.


베트남 피해자들 배상한 전례 있어

칼데라 육군장관이 밝혔듯이 진상 조사 작업은 대단히 폭넓게 이루어질 전망이다. 진상 조사가 마무리되면 그에 따른 사과는 물론 배상 작업, 나아가 가해자에 대한 기소 행위가 뒤따를지도 관심사다. 물론 과거 미국 정부는 전시에 미군이 가담한 학살 행위에 대해 그 책임을 시인하고 배상한 전례가 있다. 이를테면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8년 3월 미라이라는 베트남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미군 제11 보병여단 소속 부대원들이 임신부와 어린이가 포함된 마을 주민 수백 명을 한 곳에 모아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해 무려 5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진상이 베일에 가려 쉬쉬해 오다, 사건 가담 병사가 제대 후 폭로해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학살에 가담한 부대 책임자가 기소되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도 이루어졌다.

미국 정부는 현단계에서 ‘철저한 진상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을 뿐, 조사에 따라 어떤 후속 조처를 취할지 아무런 말이 없다. 다만 칼데라 육군장관은 조사를 통해 ‘부적절한 일’이 벌어진 것으로 드러나면 정부에 ‘적절한 조처’를 취하도록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비록 외교적 언사로 포장하기는 했어도, 노근리 양민 학살이 진상 조사 결과 사실임이 확인되면 미국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와 피해자 가족에게 배상할 길을 열어놓고 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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