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법조 비리 수사, ‘용두사미’ 걱정된다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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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미제표 근거로 변호사·판검사에 대한 종합 수사 원해
이종기 변호사(47) 비리 사건은 전 사무장 김 현씨(42)와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발이 너른 김씨는 숱한 사건을 물고 왔는데 이것이 그의 ‘간’을 키웠던 모양이다. 일을 많이 했으니 돈도 좀 많이 써야겠다고 생각한 김씨가, 이변호사 허락 없이 변호사 사무실 공금에 손을 댔던 것이다. 수임률 전국 5위를 자랑하던 이변호사는 ‘엘리트 의식’이 강해 이런 것을 눈감아 줄 수 없었다.

97년 초 이변호사는 김씨를 해고하며 퇴직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자기 나름으로 수당 등을 보태서 퇴직금을 계산한 김씨는 “퇴직금이 적다. 4천2백만원을 더 달라. 그렇지 않으면 비리를 폭로하겠다”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해 이변호사가 공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자 두 사람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미제표에 전·현직 판검사 33명 등장

김씨는 98년 10월 망치를 들고 이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집기를 때려부쉈다. 그 즉시 이변호사는 대전 중구 목동파출소에 신고했고, 사건을 넘겨받은 대전지검은 김씨를 긴급 체포했다가 나중에 풀어 주었다.

98년 변호사들의 탈세가 자심하다고 판단한 대전세무서는, 수임 건수에 비해 자진 신고율이 저조한 변호사들에게 수정 신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변호사만이 이에 응하지 않아, 대전세무서 홍○○ 과장 등이 정밀 조사에 나섰다. 조사를 마친 대전세무서가 새 고지서를 발부하자, 이변호사는 세무 조사 배경에 김씨의 ‘장난’이 있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세무서가 추가로 세금 고지서를 발급한 것은 ‘허위 공문서를 작성’한 것이고, 자신이 항의한 내용을 받아 주지 않았으니 이는 ‘직무 유기’를 한 것이며, 홍과장이 넌지시 ‘금품을 요구’하는 발언을 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대해 홍과장은 무고(誣告)로 맞고소했다.이변호사 수임 비리 사건은 이런 과정을 거쳐 터졌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김씨는 올해 초 평소 알고 지내던 대전 MBC 서○○ 기자를 만나 A4 용지 6백32장분량의 미제(未濟)표를 제공했다. 미제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라는 뜻인데, 이 표에는 92년 개업한 이변호사가 97년 김씨를 해고할 때까지 수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할 당시에는 피의자·피고인 처지에서는 아직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므로, ‘미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미제표에 이름이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의뢰인이 ‘이 사건은 이렇게 결말지었으면 좋겠다’는 따위 희망 사항과 함께 수임료를 지불한 다음이다. 그래서 이 미제표에는 수임료 중 일부를 사건을 소개한 법원·검찰 직원과 경찰관·교도관들에게 지불한 내역도 적혀 있다. 미제표는 이변호사가 사건 소개와 상관없을 것 같은 법원·검찰의 여직원과 운전기사들에게도 돈을 돌려 ‘관리’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제표에는 고검장을 지내고 현재 장관급인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사람, 대검 ○○부장을 지내고 현재 ○○지검장을 맡고 있는 사람 등 전·현직 검사 27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법원장 출신을 비롯한 전·현직 판사 6명과 변호사 11명도 등장한다.

변호사들이 이변호사에게 사건을 소개한 이유는 매우 특이하다. 이변호사는 대전지검 형사부장 출신이어서, 전관 예우 차원에서 형사 사건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이변호사에게 넘기면 의뢰인의 희망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변호사들이 이변호사에게 사건을 ‘이첩’하고, 수임료를 나눈 것으로 추정된다.“초임 판검사에게 수사·재판 맡겨라”

김씨로부터 미제표를 넘겨받은 대전 MBC가 미제표 사본을 대전지검에 전달하자, 대전지검은 이문재 차장을 중심으로 수사반을 만들었다. 미제표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란’ 대검은 즉시 김승규 감찰부장을 내려보내고, 이원성 대검 차장이 직접 수사를 총괄 지휘하기로 했다. 대법원은 물론이고 대한변협도 이변호사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 평소에는 모래알 같던 법조 3륜이 사상 최대의 사건을 맞아 뭉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검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제표 원본을 갖고 있는 MBC 방송이다. 그러나 미제표에 나온 판검사들 이름 옆 소개료 지불 난은 비어 있다. 이문재 대전지검 차장은 이를 의식한 듯 “미제표에는 판검사들이 받은 돈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아무개 검사장이 돈을 받았다고 보도한 <한겨레> 보도는 오보이다. 이러한 오보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니 신중을 기해 달라”라고 기자에게 위협 아닌 위협을 가했다.

이차장의 이러한 발언은 MBC가 갖고 있는 미제표 이상은 수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MBC보다 더 무서운 것은 김 현씨의 진술이다. 검찰은 1월11일 자진 출두한 김씨를 상대로 미제표 입수 및 폭로 경위와 함께 미제표 외에 다른 비장부를 은닉하고 있는지, 사건 소개인에게 직접 돈을 건넸는지에 관해 조사하고 있다. 김씨는 “미제표 내역서 상의 비용은 활동비일 뿐 소개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애써 수사의 폭을 축소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이변호사가 판검사들에게 제공한 돈을 수사하는 것이다. 미제표에 충실한 수사가 아니라, 미제표를 근거로 변호사-검사-판사로 이어지는 법조 3륜에 대한 종합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종기 변호사 사건은 용두 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가능성은 “만약 돈을 받은 판검사가 있다면 무슨 법률을 적용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이차장이 “변호사법 위반죄를 걸겠다”라고 답변한 데서 유추된다.

일반 공무원이 돈을 받고 사건을 알선했다면, 검찰은 형법의 ‘알선수뢰죄’를 적용할 것이다. 받은 금액이 많을 경우에는 특가법상의 알선수뢰죄를 적용한다. 판검사도 국가 공무원인 이상 돈을 받고 사건을 알선했다면 이는 형법이나 특가법상의 알선수뢰죄를 적용해야 마땅하다. 또 법관징계법과 검사징계법이 있으니 이 법도 적용해야 한다.

받은 돈의 액수가 큰 판검사에 대해서는 형법이나 특가법 위반, 법관·검사 징계법 위반, 변호사법 위반을 동시에 적용하고,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판검사에 대해서는 법관·검사 징계법과 변호사법 위반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기소 독점권을 갖고 있는 검찰은 돈 받은 판검사를 변호사법 위반으로만 기소할 가능성이 높다.

변호사법 위반에 대한 최고 벌칙은 징역 5년이나 벌금 천만원이다. 그나마 정식 재판에서는 판검사로 재직하며 국가를 위해 봉사한 것을 인정받아 작량 감경(酌量減輕)이 이루어지므로, 벌금 몇백만원 선고가 고작일 것이다. 더구나 법관은 헌법 106조에 따라 신분을 보장받기 때문에 아예 기소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법률 전문가’인 검찰이 이런 점을 강조하며 변호사법 위반으로만 기소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여론몰이를 할 가능성이 높다.

재야 변호사를 특별검사로 임명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변호사가 판검사의 ‘품위 유지비’를 제공하는 법조 비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변호사 사회에서 가장 깨끗해야 할 대한변협의 윤리위원장까지 알선 수재로 기소될 만큼 변호사 사회의 비리는 적지 않다. 법조 3륜은 결국 구정물 위를 떠다니는 ‘백조’였다.

한 법조인은 ‘가재는 게 편일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면서 “사법연수원을 막 졸업해, 선배 법조인들과 거의 인연이 없는 초임 판검사에게 수사와 재판을 맡겨야 법조 3륜 비리를 밝힐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국 검찰에는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다. 기소권을 가진 검찰이 누우면 나라도 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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