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후보들, 가두리 그물 찢다
  • 문정우 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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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권 후보들, 한국정치학회 여름 학술대회서 정치 소신 ‘기염’
 
한국정치학회(회장 신정현) 96년 여름 학술대회가 지난 6월27~29일 부산 파라다이스 비치 호텔에서 열렸다. ‘현대 한국 정치의 재성찰’이라는 주제를 내건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논문이 80여 편이나 쏟아져나왔지만, 정작 주인공보다는 초청 인사들의 강연 내용에 눈길이 쏠렸다. 이른바 대권 후보 주자군으로 불리는 여야 중진들이 대거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술대회가 열리는 동안 각자 초청된 끼니 때에 맞춰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경쟁적으로 ‘정치 소신’을 피력하고 돌아갔다.

특히 이번 대회에는 여야 모두의 눈길이 쏠려 있었다.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두 기둥인 김영삼 대통령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모두 이번 대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국당 강삼재 총장은 이번 대회에 앞서 강력한 어조로 ‘대권 발언 자제’ 경고를 발한 바 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은 대권 발언 중지를 당부하려고 여권 중진들과 개별 접촉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여권에서는 김대통령이 내린 대권 경쟁 중지 경고가 대권 후보 주자들에게 얼마나 먹혀들지가 관심이었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측은 초청된 인사가 다름 아닌 김상현 의원이었기 때문에 바짝 긴장했다. 김의원은 요즘 들어 부쩍 김총재의 권위에 도전하는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권에서는 김의원이 정치학회에서 ‘폭탄 선언’을 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돌았다. 이에 맞서 동교동측에서는 만약 김의원의 발언이 한계를 넘어선다면 결별까지도 불사한다는 말을 언론에 흘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여야 대권 후보 주자들은 눈에 띌 정도로 발언 강도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대회 자체를 ‘소문난 잔치’로만 만들지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위험 수위를 넘나들며 할 말은 다 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스의 경고 의식한 ‘치고 빠지기’ 화법들


대권 발언에 불을 당긴 사람은 뜻밖에도 첫날 만찬 연설을 한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였다. 대권 문제에 관한 한 ‘무심’을 표방해온 그는 막상 만찬석상에서는 “학교를 떠날 때는 나 자신의 결정이 중요했으나 이후에는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진로가 결정됐다”라고 얘기했다. 김대통령이 자신을 차기 대권 후보로 선택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사실 이홍구 대표의 최근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정치학회 연설이 있은 다음날인 28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세미나에서도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누가 떠민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정치는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토를 달았다. 그는 세미나가 열리기 전에 배포한 연설문에 ‘다양한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는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가 취소하는 작은 소동을 벌였다. 그의 일련의 발언은 여권 내에 구구한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당 대표로서 다른 대권 후보 주자들을 견제해 김대통령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대권 발언의 강도를 높이고 내각제까지 연상케 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대권후보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본다.

아무튼 그의 발언은 다른 후보 주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대표가 연설한 다음날 아침 최형우 의원은 그의 평소 지론인 정보화와 행정 구역 개편, 사회간접자본 확충 필요성에 대해 긴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었다. 그는 ‘정치인은 바른 역사관과 역사 의식을 지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14대 국회 때 통일 독일을 방문해 독일 정부 관계자에게 들었던 ‘감명 깊은’ 얘기를 소개했다. ‘독일 정부는 동독 국민 누구에게나 공직에 오를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용서 못할 사람은 예외이다. 역사를 배신한 자가 공직에 오르면 국민이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얘기였다.

이어서 그는 자기가 ‘지난 37년간 정치한다고 생각지 않고 독립 운동한다는 열정으로 쉴새없이 민주화 투쟁을 했고 그래서 문민 정부를 출범시킨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요즘 들어 민주화 정신이 차츰 잊혀져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는 민주화 투쟁에 매진해온 인물이 차기 정권을 맡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 날 오찬 연설을 맡은 이한동 의원의 얘기는 최의원의 주장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이의원은 ‘본래 특별한 말씀을 안드리려고 했으나 석학들이 함께한 이런 자리에 언제 다시 참석할 수 있을지 몰라 15~16년간 품고 있던 생각의 일단을 비치겠다’라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이제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투쟁적 리더십이 아닌 효율과 생산성, 경영마인드를 갖춘 합리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노자의 <도덕경>과 조선 말 유학자인 최한기의 말을 인용해 통치자는 지연 학연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 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해 김대통령의 지역 편중 인사를 우회 비판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한다’라는 꽃동네 오웅진 신부의 얘기를 소개하며, 이제 백년대계의 개혁은 많이 했으니 국민 통합과 화합에 기여할 실생활 개혁과 사랑의 정치를 펴야 한다며 연설을 맺었다. 사회자는 그의 얘기를 ‘폭군을 극복하고 영남과 호남을 통합한 왕건의 정치 철학을 본받자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의 얘기 속에는 ‘위험 수위’에 가까운 김대통령 비판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찌든’ 리더십이 차기 대권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번 대회 마지막 만찬에서 김상현 의원은 장장 80분 동안이나 연설했다(다른 초청자들은 짧게는 10분, 길어야 20분 정도 연설했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김대중 총재의 그늘에서 커온 측근형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화 투쟁의 길목길목에서 나름으로 당당한 몫을 해온 정치 거목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대중 총재에 대해 치고 빠지는 식의 공세를 되풀이했다.

그는 ‘아침 신문을 보니까 동교동에서 김상현이가 정치학회에 가서 연설하는 것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나왔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폭탄 선언을 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내가 무슨 테러리스트인 줄 아는 모양’이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김총재가 은퇴해 안계신다면 이 김상현이가 도덕적으로 보나 정치력으로 보나 가장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김총재가 계시는 한 그 분의 97년 집권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한발짝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고조 유방이 학식은 장량만 못하고 무예는 한신만 못해도 그들을 동원해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라는 예를 들면서, 현 정치권에서는 자신이 통합과 조정에 가장 능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정치학회 학술대회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의 강력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차기 주자들의 경연 무대가 되었다. 이는 앞으로 정치권에 닥칠 파란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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