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북풍 만들기’ 뒷거래 의혹
  • 김 당 기자 ()
  • 승인 1997.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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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정재문 의원 조평통과 접촉했다”…이 아무개 의원도 9월 비밀 방북
설마 했던 북풍(北風)이 또 선거 막판을 덮치고 있다. 그것도 북한 당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대선에 영향을 주는 ‘자연풍’이 아니라 여권이 북한의 개입을 유도해 일으킨 ‘인공풍’일 가능성이 높다.

〈시사저널〉은 지난호에서 ‘평양발 오익제 편지’와 관련해 이같은 음모의 한 자락을 내비쳤다. 오익제씨가 10월31일 김대중 총재(DJ) 앞으로 부친 편지는 제3국(중국)에서 ‘중개인’을 거쳐 한 달 만에 도착했고, 한나라당 정 아무개 의원이 중개인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었다(〈시사저널〉 제425호 참조). 정 아무개 의원은 바로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통일외무위·정보위)이었다. 기사에서 실명을 밝히지 않은 까닭은 정의원이 ‘편지 거래설’은 물론 북한 고위층과 접촉한 사실 자체를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12월7일 정의원의 한 측근은 “정의원이 11월에 중국에 간 사실은 있으나 한·중 포럼 참석차 김 덕 의원 등과 함께 갔으며, 정보위 최고참 의원인 정의원이 북한과 비밀 접촉해 거래를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편지 거래설’을 보도한 〈시사저널〉이 10일부터 배포되고, 13일 국민회의가 정의원의 거래 개입 의혹을 제기하자 뒤늦게 접촉 사실을 시인했다.

이 날 국민회의 박홍엽 부대변인은 “정재문 의원이 지난 11월 북경에서 두 번에 걸쳐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안병수 위원장(대리)과 비밀 회담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정의원과 안병수 위원장은 한국의 대선을 한나라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남북 경협과 관광 개발 등에 대한 교섭을 했고, 그 대가로 북한에 상당한 금품을 주기로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주장했다. 박부대변인은 교섭의 근거로 11월17일 안병수 조평통 위원장 비서인 리상대가 이 교섭을 주도한 재미 교포 김 아무개씨에게 보냈다는 팩스 서신의 사본을 공개했다.

안기부, 정재문 의원 왜 조사했나

이 교섭을 주선했다고 지목된 ‘재미 교포 김 아무개씨’는 바로 김양일 전 재미한인식품상연합회장이다. 김씨는 〈시사저널〉이 단독 보도한 ‘청와대 밀가루 북송’ 사건에서 밀가루를 중개한 인물이다. 김씨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리상대 비서가 보낸 서신의 전문(全文)은 이렇다.

‘보내주신 확스(팩스) 모두 정확히 받았으나 회답이 늦어져 대단히 죄송합니다. 서로 간의 계약 건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가 없으며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우리 계약 대표단은 현재 하르빈(하얼빈)에서 귀대표단을 대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김회장이 걱정하고 있는 대표단은 귀대표단에 만족을 줄 수 있으므로 더 의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다만 일정에 변동이 없고 약속된 대로 계약이 성사되도록 마지막까지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20일 약속된 장소에서 반가운 재회를 기대합니다.’

박부대변인은 이어 정부 당국이 이같은 사실을 조사한 적이 있는지, 정의원이 통일원의 승인을 받고 접촉했는지, 정의원의 대북 접촉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아닌지 등을 통일원에 공개 질의했다. 그러자 통일원은 12월13일 오전까지만 해도 정의원의 접촉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추가 입증 자료를 거론하는 등 낌새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통일원은 정재문 의원이 11월20일 북경 장성 호텔에서 안병수 조평통 위원장대리를 만난 사실이 있으며, 정의원이 이와 관련한 북한 주민 접촉 보고서를 12일 통일원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통일원은 또 정의원이 접촉 보고서에서 그 경위를 ‘11월20일 아들을 만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을 때 안병수 위원장이 숙소인 장성 호텔로 전화를 걸어와 이 호텔에서 만나 옛이야기를 나눴다’고 보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접촉 경위나 해명은 설득력이 없는 ‘짜맞추기’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통일원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수용하더라도 정의원은 11월20일 접촉했으면서도 국민회의가 발표하기 바로 전날(12월12일)에 접촉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는 7일 이내에 접촉 사실을 신고하게 되어 있는 남북교류협력법 시행령을 위반한 것이다. 안기부를 통제하는 정보위의 ‘최고참 위원’인 그가 자신의 위법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안기부가 정의원을 조사했다는 사실이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안기부는 정의원이 11월5∼9일, 11월20∼21일 두 번에 걸쳐 북경에서 북한의 대남 공작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안병수 위원장 대리와 접촉한 배경을 조사했다.

정의원은 서울 강남의 라마다르네상스호텔과 인터콘티넨탈호텔의 안기부 전용 룸에서 두 번 조사를 받았다. 따라서 정부 당국이 비밀 접촉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의원은 통일원에 접촉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정의원은 2차 접촉과 관련해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안병수 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와 만난 것처럼 밝혔다. 그러나 앞서 밝힌 안병수 위원장의 비서가 보낸 서신에는 ‘20일 약속된 장소에서 반가운 재회를 기대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의 만남은 사전에 비밀리에 준비된 접촉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서신은 북경 접촉이 개인 자격의 만남이 아니라 남북 ‘대표단’ 간의 어떤 ‘계약건’과 관련된 회담임을 드러내 준다. 또 2차 접촉이 ‘우연한 만남’이라면 1차 접촉의 경위는 무엇인지 해명이 안된다. 다만, 정의원은 13일 통일원 발표 이후 긴급히 낸 보도 자료에서 ‘한·중 수교 5주년 기념 행사와 관련해 중국 사회과학원 초청을 받고 11월5일과 20일 두 차례 북경을 방문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대북 관계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서신의 ‘계약건’과 관련해 “그 계약에서 1차로 현금 3백만 달러가 건네졌다”라고 증언했다. 이 소식통은 그에 대한 북한측 ‘선물’이 바로 오익제 편지를 포함해 특정 후보를 겨냥한 일련의 ‘편지 공세’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한나라당과 정보기관의 일부 극소수 인원이 참여한 이 대북 사업은, 당초 북한측 협상 파트너가 오익제씨를 북경이나 심양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평양발 편지 공세’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2일 오씨가 평양방송에 출연해 DJ를 음해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져 〈시사저널〉이 지난호에서 보도한 이른바 ‘오익제 비디오 테이프’ 건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특정 후보를 겨냥한 북한의 대남 편지 공세는 여러 경로로 확인된다. 〈시사저널〉이 확인한 편지만도 네 가지나 된다. △안기부가 5일 목동 국제우체국에서 압수한 오익제 편지(10월31일 ‘평양발’로 작성후 11월20일 북경에서 부침)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 앞으로 보낸 ‘김장수 편지’(11월20일께 북경발로 DJ 음해 내용) △8일께 〈중앙일보〉에 팩스로 보낸 김병식 편지(11월 중순 작성해 DJ한테 보낸 3장짜리 편지) △김덕수 편지(12월6일자로 제목은 ‘김대중의 련북관계’) 등이다.

이 중 조선사회민주당 김병식 위원장 명의로 된 편지는 당초 유성환 전 의원(국민신당)에게 보낸 것을 유씨가 안기부에 신고한 것인데, 누군가 언론에 보도되게 할 목적으로 팩스로 넣은 것이다. 그 내용은 DJ가 71년 일본 한민통 활동과 관련해 2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는 것이다.

북한, 외화벌이 차원에서 북풍 공세

한편 김덕수 편지의 핵심 내용은 DJ가 11월에 전직 의원을 북경에 보내 접촉케 했고, 12월 초에는 의원 출신 해외 교포를 북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두 편지는 공교롭게도 11일 오후 재미 교포 사업가를 자처한 윤홍준씨의 북경 기자회견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96년부터 6회 방북했다는 윤씨는 이날 DJ에 대한 ‘김정일 비자금 지원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북경 주재 한국 특파원들에게 10장짜리 유인물을 돌렸다.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지만 결론이 황당한 윤씨의 주장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자 윤씨는 13일 다시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앞서의 소식통은 이같은 일련의 선거 개입 공세를 아시아·태평양위원회(위원장 김용순·부위원장 안병수)가 주도하고 있다고 밝혔다(아태위원회는 북한의 대남 공작 부처 중의 하나인 통일전선부의 외곽 단체이다). 이같은 대남 공작의 1차 목적은 북한 당국이 부담스러운 특정 후보를 떨어뜨리려는 것이지만, 그 배경을 보면 외화벌이 차원의 소극적 개입이라는 것이다. 즉 당초 남북한 특정 세력 간의 ‘계약’ 조건은 96년 4·11 총선 전의 판문점 무력 시위 같은 ‘적극적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었지만, 북한으로서는 특정 후보가 1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같은 적극적 개입은 너무 부담이 크기 때문에 ‘소극적 개입’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김정일 총비서 또한 새 정부와의 관계 개선과 남한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고, 남북 관계 악화가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력 시위 같은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러나 외화벌이가 충성도의 최고 가치로 간주되기 때문에 아태위원회 같은 특정 세력이 한국의 특정 세력과 맺은 거래 계약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편지 공세를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이 소식통은 선거 직전까지 이같은 소극적 공세가 계속되겠지만 대세가 결정나는 14일 이후에는 더 이상 북풍(자연풍)이 없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여권, 처음에는 ‘온풍’ 추진

당초 여권(당시 신한국당) 핵심부가 대선에 대비해 기획한 극비 대북 프로젝트는 이회창 후보의 방북과 이산 가족 상봉을 골자로 한 ‘온풍’이었다(〈시사저널> 제411호 커버 스토리 참조). 즉 역대 정권이 즐겨 써온, 김대중 후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한풍’보다는 여당 후보의 이미지를 좋게 하고 득표에도 긍정적인 온풍을 이번 선거에 유인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대선 정국을 강타한 병역 회피 의혹에다 이인제 후보의 선전(善戰)으로 상황이 어렵게 되자 여권으로서는 ‘찬밥 더운 밥’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사실은, 한나라당(당시 신한국당) 이 아무개 의원이 지난 9월 비밀 방북했다는 점이다. 〈시사저널〉(제404호)이 단독 보도한 ‘황장엽 리스트’에도 올라 있는 이 의원은 여권 핵심부의 극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임무를 띠고 방북해 △북한 당국의 이회창 후보 방북 초청 및 정상 회담 △이산 가족 상봉 △대북 경협 및 관광개발 사업 지원 건을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소식통은 “정재문 의원의 비밀 접촉 및 계약 건은 바로 이의원이 수행했던 임무를 인계받은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국민의 심판(대선)이 끝난 뒤,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북풍을 유인하고 거래한 ‘이적 행위’에 대한 심판도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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