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배’에 구멍 뚫는 민주계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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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舟 대권대세론’ 정착 우려해 맹공…김윤환의 반격 만만찮아
‘빈배에 구멍을 뚫어라’. 허주(虛舟) 김윤환 대표를 겨냥해 민주계 일각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한 민주계 인사는 “누대에 걸쳐 권력의 풍랑을 헤쳐나온 백전노장 빈 배(허주)를 침몰시키는 길은 배에 구멍을 뚫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요즘 민자당 주변에서는‘빈 배’에 구멍을 뚫으려는 민주계의 ‘허주 침몰 작전설’이 나돌고 있다.

검찰이 (주)한양 배종렬 전 회장을 6공 비리 수사에 올린 것은 허주를 겨냥한 포석이라는 소문도 있다. 여기에 여의도연구소의 ‘6공단절론’까지 터졌다. 그동안 흠집내기 차원에 그쳤던 민주계의 허주 거세 작전이 더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윤환과 민주계의 예고된 전쟁

허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11월4일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갖고 민주계에 전면적인 반격을 가했다. 웬만해서는 정면 대결을 피하는 그의 정치 행태로 보아 이 날 간담회는 근래 보기 드문 강공이었다. 김대표는 간담회에서 최근 민주계가 흘렸거나 민주계가 좋아할 만한 사안들, 예컨대 6공단절론이나 정계개편설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전 날 고위당직자회의에서도 고함을 지르고 육두문자를 입에 올리면서 민주계의 정계개편론을 걷어찼다. 김대표는 11월6일 여의도연구소 이영희 소장에게 “6공단절론의 진위를 밝히라”고 호통쳤다. 민주계에 대해 ‘이 김윤환이를 계속 흔들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경고이자 선전 포고인 셈이다. 이로써 허주와 민주계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제 어느 한쪽이 고개를 숙이지 않는 한 김대표와 민주계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민주계가 허주를 침몰시키려 했던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93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 민주계 유성환 의원은 “대선 채무 때문에 문민 정부의 정통성이 훼손돼서는 안된다”며 반 김윤환 기치를 들고 나왔다. 사태는 가까스로 봉합됐지만, 유의원의 발언은 민주계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었다. 민주계의 눈에는 김대표가 비록 대세론을 펴며 YS 대통령 만들기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지만, ‘3공에서 5,6공을 거쳐 문민 정부까지 권력의 노른자위만을 차지해 온 줄타기의 명수’이자 ‘위험한 야심가’이다.

김대표와 민주계는 당장 총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거의 180도 차이가 난다. 민주계는 당내 5,6공 세력을 떨어내고 개혁 세력을 한데 끌어모아야 한다는 정계개편론을 펴고 있다. 세대교체론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김대표의 생각은 정반대다. 보수·안정 희구 성향의 표를 모으기 위해서는 5,6공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노씨 문제는 개인 비리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대표와 민주계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더 중요한 이유는 대권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민주계는 허주가 자신을 영원한 킹 메이커라며 자세를 낮추고 있지만, 때가 되면 대권 도전 야심을 드러낼 위험 인물이라고 본다. 민주계는 또 허주 체제로 총선을 치를 경우 여권내 기류가 자칫 김윤환대세론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민주계 차기 주자들의 뇌리에는 91년 대선 당시 김대표가 대구·경북 민심을 달래면서 즐겨 말했던 대권 스킵론, 즉 ‘이번에는 YS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다음에 우리(TK)가 정권을 다시 되찾아 오자’는 말이 생생히 남아 있다. 최형우·김덕룡 의원과 같은 민주계 차기 주자들이 허주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계 중진들로서는 이번 기회에 김대표를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기세는 꺾어 놓아야 그의 공천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다. 어쨌든 김대표가 기자 간담회를 통해 민주계에 정면 공세를 가한 이상 민주계도 2단계 허주 고사 작전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민주계가 확전을 포기하고 봉합 수순을 밟더라도, 허주를 물밑에서 흔드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사실 김대표는 민주계에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그 위력이 예전 같지는 않다. 노태우씨 사건은 가뜩이나 좁은 민정계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더구나 김대표는 노씨와 경북고 동창이고 6공 때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세였다. 2년7개월 전에 있었던 가락동 연수원 부지 특혜 매각 사건도 그를 찜찜하게 만들고 있는 부분이다. 망망대해 위에 뜬 ‘빈 배’에 또 한번 풍랑이 몰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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