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군부,수하르토 몰아낼까?
  • 金鎭華 편집위원 ()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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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복종’에서 ‘하야 요구’로 선회…민간인 옹립해 과도 정부 세울 가능성
“두세 달 안에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실업자가 넘치고 밥을 못 먹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울 것이다….”

두 달 전 반체제 지도자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여사는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예견했다(<시사저널> 제438호 24쪽). 그의 예견은 어김없이 맞아들어 가고 있다. 부유층 학생이 많은 트리삭티 대학 시위 학생 6명이 군의 발포로 피살된 사건에서 촉발된 인도네시아 군중 폭동은, 며칠 사이에 32년 동안 계속되어 온 수하르토 장기 독재의 철옹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숨진 학생들의 장례식에 나타난 19세 남학생 손에는 ‘개혁 아니면 봉기’라는 작은 카드가 들려 있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수하르토는 마치 이 경고에 놀란 듯 수습 방안을 연일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조처는 이미 시기를 놓쳤고, 국민의 마음도 그를 떠났다는 것이 현지 분위기다.

현상황에서 수하르토가 취할 수 있는 개혁은 단 한가지, 즉각 하야하는 것뿐이라고 이슬람 지도자 아미엔 라이스는 주장한다. 수하르토가 하야하지 않는 한 시위와 폭동은 탱크와 장갑차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사태는 정치적 반란이기 이전에 배(腹)의 반란이요, ‘셈바코의 반란’이기 때문이다. ‘셈바코’는 서민의 기본식인 템페·쌀·식용유·연료 등 아홉 가지 생필품을 일컫는다. 서민들이 셈바코를 수군거리기 시작하면 나라에 불길한 징조라고 한 공무원이 기자에게 말한 지 두 달 만에 ‘배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2억 인구의 80%가 지금 절대 빈곤 상태에서 셈바코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상점을 약탈한 한 청년은 이렇게 절규한다. “하루 한 끼도 못 먹어 자카르타에 왔다. 카튼 박스를 찢어 얼기설기 만든 ‘집’ 속에 들어가 죽치고 앉아 있으라는 말이냐. 먹을 것 있는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굶어 죽으란 말이냐?”

수하르토, 자진 사퇴 가능성 적어

정국의 초점은 ‘만일’이 아닌 ‘언제’ 수하르토가 물러나느냐에 모아져 있다. 그러나 그가 자진해서 퇴진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노회한 수하르토가 안개 정국을 유도하며 시간을 벌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자진사퇴설 유포, 개혁안 발표, 대국민 호소, 군부 무력 시위 등 강·온 전략과 더듬수를 섞어 가며 반전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태가 매우 악화할 경우, 사임 압력과 일전을 불사할 전투적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도 듣고 있다. 군부 내에서 ‘스마일 장군’으로 불리는 그의 인자한 듯 잔잔한 미소 뒤에는, 중국의 ‘천안문 학살’과 같은 비정한 결정도 내릴 수 있는 잔인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그는 66년 참모총장 당시 학생 봉기를 틈타 수카르노 대통령을 국외로 몰아내고 집권하는 과정에서 군을 동원해 공산주의자 백만 명을 처형했다. 75년 동(東)티모르를 침공해 인도네시아에 합병한 이래 티모르 독립운동가 20여 만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게 붙어다니는 ‘민족의 구세주’‘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찬사는 아직도 그의 현실 감각을 흐리게 하고 있다. 자의건 타의건 그의 하야는 해외 망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하르토는 군부의 충성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는 분석이다.

과연 군부는 수하르토를 위해 피를 볼 것인가? 아니면 필리핀의 ‘피플스 파워’(시민 혁명) 때와 같이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시민에 합류할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필리핀은 독립 50여 년 동안 대통령 9명을 직접 선출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있는 나라요, 인도네시아는 같은 기간에 2명의 독재자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군이 수하르토의 발포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리라고 보는 견해는 극소수이다. 첫째, 군의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으며 군 일각이 분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퇴역 장성·전직 고위 관리·사복 장교 들이 공공연히 수하르토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둘째, 군의 발포로 이미 많은 사상자를 냈고, 5백여 명의 숯덩이 시체가 텔레비전을 타고 2억 인구에게 방영된 상황에서 40만 규모의 군이 섣불리 발포할 만한 ‘사기’는 이미 꺾였다는 것이다.
과도 정부 이끌 만한 5인

수하르토 이후의 주역은 누구일까? “정치·경제 개혁과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세력은 군부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과도기가 필요하다”라는 살림 사이드 정치학 교수의 판단은 군부와 지식층이 공감하는 대목이다.

군부의 실세는 총사령관 위란토 대장, 수하르토의 사위인 수비안토 전략군 사령관, 정치·사회 담당 밤방 장군 등이다. 수하르토가 실각할 경우 위란토와 밤방 두 사람이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군부는 과도기 지도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국민 감정을 고려해 현역 장성을 내세우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군부의 지지 아래 과도 정부를 이끌 인물로 거론되는 인사는 많지 않다. 트리 수트리스노. 지난 3월까지 수하르토 밑에서 5년간 부통령을 지낸 퇴역 장성. 원만한 성격으로 군부 각파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에밀 살림. 전 환경부 장관. 스스로 자신을 반정부나 반체제가 아닌, ‘정부 정책 비판자’라고 말하는 합리주의자. 지난 3월 대통령선거 당시 지식인과 젊은이 들로부터 (수하르토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현재 군부로부터 가장 무난한 민간인 후보로 평가받는 청렴결백형.

아미엔 라이스. 2천 8백만 회교도 조직인 무하마디아의 총수. 미국에서 교육받은 반정부 지식인으로, 재야에서 가장 목청이 큰 종교 지도자.

압둘 라흐만 와히드. 아미엔 라이스의 무하마디아와 경쟁하는 조직인 회교 동맹의 총수. 메가와티 여사와 퇴역 장성·언론인 등 반정부 인사 40여 명으로 ‘인도네시아 포럼’이라는 수권 조직을 급조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다는 평.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의 장녀. 대중을 기반으로 삼아 반정부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최근 학생 시위 투쟁을 적극 지원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여전히 유력한 지도자로 주목되고 있다.

건국 사상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인도네시아 군부는 다시 한번 중차대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불과 두 달 전 40대 초반의 이브라힘(가명) 중령은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시사저널> 제438호 21쪽)에서 “인도네시아 군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이번에 근본적으로 정치·경제를 개혁해 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우리 젊은이들은 그의 오만함을 쏘아 버릴 것이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그의 이름과 사진을 보도하지 말라고 부탁하면서도, 군부 쿠데타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 시점에서 인도네시아 정국은, 그 장교의 반쪽 얼굴만을 보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밝힐 날이 의외로 빨리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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