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고 은과 계관시인 오영재
  • 고 은(시인) ()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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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고 은씨가 만난 북의 계관시인 오영재…“남북 시인에게 주어진 임무 막중”
“우리는 시의 육친입니다”라고 내가 말했다.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술의 혈육입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지난 8월17일 밤, 서울 남산 허리에 자리잡고 있는 하이야트 호텔 만찬장에서였다. 이산가족방문단 북쪽 인사들과 서울의 내빈들이 어우러져 만원을 이루었다.

나는 당연히 북쪽 계관시인 오영재씨를 부둥켜안았고 우리는 한동안 몸을 풀지 못했다. 10년 전 남북작가회담이 좌절되어 만날 수 없었던 북쪽 작가 5인 중의 한 사람이던 그를 기억한다. 그때 그가 판문점 회담장소에 와서 <자리가 비었구나>라는 시를 써서, 남쪽 작가 5인의 빈 자리를 노래한 적이 있다.

시는 사회적 영혼들의 빛

2년 전, 15일 간의 북한 편력 중에도, 두 달 전 남북 정상회담 수행 때에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남과 북의 두 시인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만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두 시인이 처음 만났을 때 첫인사가 “이제야 만났습니다”였다.

만찬이라고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어여쁜 술잔만이 건너가고 건너왔다. 술은 순식간에 10년지기를 만들어준다. 우리 둘의 첫 만남은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 나눈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우리 이 다음에는 넥타이 같은 것 매지 말고 만납시다”라고 내가 말했다. “우리 이 다음에는 다 벗어버리고 팬티 바람으로 술을 마십시다”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모국어의 자식이었다.

그가 다시 오면 그를 우리집에 데리고 와 재울 것이다. 내가 평양에 다시 가면 초대소가 아니라 그의 집에서 가서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선생 호칭을 쓰지만, 둘이 있을 때에는 형님, 동생입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아우님“이라고 내가 말했다. 우리 둘의 만남은 한 올 거짓이 없었다. 우리는 기뻤다. 하지만 술잔을 비울 때마다 우리 남과 북 시인의 앞날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모국어와 민족 동질성의 크기를 시를 통해서 발전시키는 일이 우선이다. 민족 공동체 실현을 위한 문학적 임무도 닥치고 있다. 합작 작품도 써내야 한다. 오고 가는 일의 의미도 확대해 갈 것이다. 문학 혹은 문화의 남북 관계는 경제의 저 후미에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경제 자체에도 해로운 노릇이다. 문화 교류의 당위는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공감했다.

다른 얘기가 하나 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오빠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남쪽에는 그의 형 승재·동생 형재(28쪽 시사저널 인터뷰 참조)·근재 그리고 누이가 있다. 이제까지 그는 북쪽에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나 서울에 와서 아우였고 형이었고 그리고 오빠였다. ‘오빠!’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씨를 그는 이번에 되찾은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술잔을 주고받기에 바빴다. 우리는 ‘이것이 술의 상호주의’라며 웃었다. 술은 달디달았다. 그가 피우는 북쪽 담배 ‘락원’ 한 대를 피워 보았다. 나는 1979년 노동학교를 운영할 때 담배를 끊었는데, 그때 이후로 처음 피운 담배였다.

그가 말했다. “시인은 이산자입니다.” 내가 “나는 이산가족이 아니다”라고 말한 데 대한 그의 답변이었다. 멋진 시인론이기도 했다. 아마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본질적으로 세계와 고향으로부터 흩어진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남과 북의 시인은 우리 민족의 통한인 이산 문제를 시의 울음으로 대변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 내가 말했다. “우리 둘이 남과 북 조국 산천을 떠돌면서 함께 노래하다가 여한 없이 죽자.”

전쟁과 분단 등으로 인하여 생짜로 이별해야 했던 핏줄의 아픔은 처절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힘이기도 하다. 이 울음바다 속의 첫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아직 이름짓지 못한 미지의 서사와 서정에 진입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기꺼이 우리들의 시가 민족의 공생과 통일에 기여하는 언어 행위이기를 염원했다. 아직도 시는 조국과 다른 지역의 사회적 영혼들에게 살아 있는 빛이다. 그날 밤, 헤어지는 우리 두 시인의 눈은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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