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 파울 플레이, 가난이 죄?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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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에 손 벌리기' 비판 확산… 시민단체 재정 취약, 주민 참여·법적 지원 절실

사진설명 이석연 사무총장은 이번 사건을 경실련이 거듭나는 계기로 삼을 작정이다.

지난 1월4일 열린 시민단체 공동신년 하례식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시민운동가 2백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이석연 사무총장은 시민운동가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오비이락이다. 운동가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

1997년 '소통령'김현철 비디오은폐사건, 1999년 유종성 전 사무총장 대필사건에 이어 경실련은 또다시 구설에올랐다. 이번에는 시민단체의 아킬레스건인 후원금 문제가 터졌다.

경실련이 지난해 11월29일 창립 11주년 후원의 밤 행사 때 공기업으로부터후원금 1천2백만원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경실련은 공기업의판공비낭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후원금을 요청해 도덕성 시비까지 일고 있다.

경실련은 지난해10월11일과 11월2일13개 정부투자기관에 기관장 판공비 사용 내역과 사외이사의 인적 사항 등 정보 공개를 요청했다. 12월28일 경실련은 이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투자기관의판공비가 졸속으로 집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경실련은 비판 대상인5개 공기업에 11월20일부터 후원 요청공문을 보냈다. 게다가 후원금액을 천만원으로 못박았다. 공기업의 방만한 판공비 운영을비판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손을 벌린 셈이다. 공문을 받은 5개 공기업 가운데 대한주택공사(5백만원)·한국전력(5백만원)·석유공사(2백만원)가 후원금을 냈다.

김용환 경실련 정책실장은 "시민운동가의 양심을 걸고, 모금활동과 판공비평가는 별개 사업이었다"라고 해명했다. 김실장은후원금을 천만원으로 표기한것은실수였다고 말했다. 경실련의 후원금 한도가천만원 이하인데, 담당자의 실수로 '이하'가 빠지고천만원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실련의 해명은시민들의 실망감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경실련 사이트에는 네티즌의 항의가 연일빗발쳤다. 경실련은 시민들의 볼멘 소리를 수긍하면서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석연 사무총장은 "공기업 평가와후원금 모집이 동시에 이루어진것은 실수였다. 그러나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안 받을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경실련에 따르면,중앙 조직의1년 예산은 10억원이나 된다. 이 가운데 일반 회비로 충당되는 금액은 40%이다. 회원 2만명 가운데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은3천∼4천 명인데,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일반 회비수입은 3억8천만원이었다. 나머지 부족한 재정은 기업으로부터 모금하고 사업 수입으로충당한다. 다른 시민단체의 재정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참여연대는 1만2천 회원이 후원회비를 매달 6천5백만원 내평균 재정 자립도 72%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참여연대도 후원의 밤행사를 통해100만원 미만 후원금을 기업이나 개인에게서받아야 운영이 가능하다. 환경운동연합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10월30일 후원의 밤 행사에서42개 기업으로부터 9천8백만원을 받았다. 김성희 참여연대 사무국장은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후원회원을 늘리는 것이기본이다. 그러나 외국의 시민단체도 회비만으로운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노동·여성 단체, 외국에서 지원받아

시민단체의 이같은 주장이단순한 투정만은 아니다. 지난해 초 정부 지원을 받은 시민단체를 한나라당은 '집권당의 2중대'라고비난했다. 경실련을 비롯한 몇몇 시민단체는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정부 지원을 일절 거절했다. 도덕성을 지키려고 배고픈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기부 문화가 성숙하지 못한상황에서 정부 지원마저 거부한 시민단체는 기업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기업의 후원금을 받는 것 자체를 '도덕적 타락'이라고 매도한다면 시민단체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시민운동가의 항변이다.

김호기 교수(연세대·사회학)는 시민단체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간접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교수는 시민단체에 세제 혜택을 포함한 간접지원을 제도화하면,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강조했다. 김교수는 또한 시대 변화에 맞게지원법을 정비하라고 요구했다. 한 예로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에 기부금의 운용비 전용을 2%로 묶어둔 것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판했다.

'함께 하는 시민행동' 하승창사무차장은 공익 재단을 통한후원을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공익 재단 4만개가 시민단체를후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그런공익 재단은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정도이다. 실업극복국민운동·시민운동지원기금·아름다운재단 등이민간 기금을 조성해시민단체를 지원하고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독일 기민당계의 아데나워 재단이나 사민당계의 에버트 재단 등으로부터 한국 여성단체와노동단체가 지원받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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