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대장정 큰 걸음 내딛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press.com)
  • 승인 2002.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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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금융 개혁 조처도 곧 발표할 듯
서해 교전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지난 7월6일. 일본의 한 지인이 기자에게 e메일을 보내왔다. ‘최근 평양에서 돌아온 사람에 의하면 북측에서는 지금 통화를 올리는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전’을 다 없애고 ‘원’을 쓰고 있다. 10전이었던 버스와 지하철 운임이 1원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임금도 18배 올랐다.’


당시 국내에서는 김정일 위원장 등 북한 수뇌부가 서해 교전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를 둘러싸고 한창 시비를 벌일 때였다. 그런 마당에 통화 조정에 물가 인상이라니. 뭔가 너무 한가해 보였다. 그런 연유로 그의 ‘제보’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나면서 주로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7월6일의 일본쪽 전언 내용을 확인하면서 몇 가지 충격적인 내용을 추가했다. 7월 초부터 배급제를 폐지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지난 50여 년간 북한 사회주의의 기본 골간이 되었던 제도가 무너졌다는 얘기다.



물가와 임금 인상에 대해서도 더 상세한 배경 설명이 이어졌다. 쌀을 비롯한 생필품과 공공 요금 등에서 국정 가격이 폐지되고 암시장 가격이 시장 가격으로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kg당 10∼20전에 불과하던 쌀값이 하루아침에 암시장 가격인 45원으로 인상되었다. 그 대신 각종 임금을 인상함으로써 어느 정도 충격을 줄였다. 노동자·농민·과학자·광부 등은 10배, 당 간부들은 14∼17배 정도의 급료 인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인플레 등 개혁 후유증 해결책 마련



그동안 많은 언론이 이같은 조처의 배경을 상세하게 전했다. 특히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1995년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쉽게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95년 이전만 해도 근로자 평균 임금인 조선돈 100원이면 그럭저럭 먹고 살 만했다. 즉 배급 식량의 국정 가격이 kg당 20전(1원=100전)이라고 할 경우, 성인 1인이 한 달에 약 20kg을 소비한다고 칠 때 4인 가족으로 따지면 약 16원이면 먹는 일이 해결된다. 공산품을 제외한 생필품 가격, 버스·지하철 등 대중교통비, 학비·병원비 등도 비교적 싸서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식량과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배급이 중단되고 국영 상점에서 물건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국정 가격의 수십 배에서 수백 배에 이르는 농민시장이나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야 했다. 쌀의 경우 암시장 가격이 kg당 45원이니 국정 가격의 약 4백50배다. 그런데도 근로자 평균 임금은 100원으로 묶여 있어 이 돈으로는 겨우 쌀 2kg 정도를 구입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일부 힘 있는 계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농민시장이나 장마당에서 부업으로 장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조처는 이같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북측이 최근에 취한 조처들은 몇 가지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선 배급제 폐지에 대한 부분이다. 특히 북한 현실을 잘 알고 있는 탈북자들은 다른 보전 조처 없이 이 정도만 가지고 배급제를 폐지했다는 데 대해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아무리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지만 평양 시민은 여전히 배급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언론 보도를 토대로 할 때 인상된 임금만 가지고는 물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점이다. 앞의 기준 대로 다시 계산해보면, 쌀 1kg에 45원 잡고, 성인 1인당 한달 20kg이면 9백원이다. 4인 가족의 경우 넉넉잡아 3천6백원, 최소한 3천원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 노동자 임금을 10배 올려 봐야 100원의 10배면 천원, 맞벌이를 해도 2천원이다. 쌀값도 충당하기 어렵다. 여기에 기타 생필품 및 공공 요금에까지 시장 가격을 적용하면 부업을 하지 않는 한 턱없이 부족하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당장 시급한 것은 역시 인플레 문제다. 물가를 올리고 그것을 임금 인상만 가지고 상쇄하려 할 경우 화폐 증발을 피할 수 없다. 이 경우 늘어난 화폐가 장마당이나 농민시장으로 흘러가면 그만큼 가격이 치솟는다. 결국 이같은 인플레 현상으로 인해 임금 인상 효과가 사라지는 것이다. 한국은행 조사국 북한경제팀의 박석삼 과장은 “농민시장이나 장마당에 대한 물자 공급을 늘려 물가를 안정시키는 조처가 선행되지 않으면 악순환에 빠질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북측이 개혁 조처의 전모를 공식 발표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보가 조금씩 흘러나오다 보니 뭔가 앞뒤가 안맞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 북한 전문가들이 베이징 등에서 북측 관계자로부터 입수한 내용이나 옌볜 등지의 조선족 사업가, 미국·일본 소식통들의 전언을 종합해 보면, 북한이 이미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북측의 최근 조처는 물가나 임금 등에 국한하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포괄적이며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옌볜의 한 대북 사업자는 올해 초 북한 당국 내에서 전개된 환율 조정에 대한 논의가 이번 조처의 출발점이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북한 원화와 중국 인민폐의 공식 환율은 1 대 1이었다. 그러나 나진·선봉 지역이나 암시장에서는 25 대 1로 유통된다. 북한 원과 달러 환율도 이처럼 이중적이다. 공식 환율은 달러당 2.16원(나진·선봉은 이미 달러당 2백원으로 공식화)이나 암시장 거래 가격은 달러당 2백원이다. 결국 이같은 현실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내부 논의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임금과 물가 인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센티브제로 생산량 늘릴 계획





지난 7월1일부터 시작된 일련의 개혁 정책 실행은 물가·임금·환율의 조정 수준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국내의 한 북한 전문가가 북측 관계자로부터 매우 포괄적인 개혁 조처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확인했다.
그 역시 환율 조정 사실로부터 개혁 조처의 내용을 설명했다. 7월1일자로 과거 달러당 2.16원 하던 공식 환율을 달러당 190원으로 바꾸었다. 그 다음 배급제를 폐지하고, 월급과 물가를 인상한 것은 이미 보도된 내용과 같다. 그리고 국정 가격이 폐지되었으니 앞으로 국영 상점들이 시장 가격으로 물건을 취급할 예정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언론들은 이번 조처가 농민시장과 장마당의 현실을 인정한 조처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그 반대일 가능성을 간과했다. 오히려 국영상점을 정상화해 농민시장과 장마당으로 인해 왜곡된 유통 기능을 바로잡고자 하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건은 어떻게 공급하나. 농업과 공업 부문에 주어지는 파격적인 인센티브제에 그 해답이 있다. 우선 농업 부문부터 보자. 그동안은 1년에 얼마를 생산하든 가구당 일정량을 제외하고는 전부 국가가 거두어 갔다. 따라서 농민의 생산 의욕이 떨어져 농업 생산이 계속 줄었다. 그 대신 개인용 텃밭에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왔고, 여기서 생산된 농산물이 농민시장을 활성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조처에 따르면, 앞으로는 협동농장 생산물 중 국가에 헌납하는 비율이 15%로 대폭 낮아진다. 그리고 나머지 85%는 국가가 시장가격으로 전량 수매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굳이 텃밭에 매달릴 필요 없이 협동농장만 열심히 해도 농민 개인의 소득이 증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농장 생산물량은 증가하고 텃밭 생산 부분은 감소함으로써 농민시장이 위축되고 국영상점 기능이 활성화할 수 있다.



공업 부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처가 취해졌다고 한다. 즉 국가가 할당한 일정량의 계획분만 내고 나머지는 각 공장이 국영상점에 시장가격으로 내다팔 수 있게 되었다. 각 공장은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잉여 수입을 노동자들에게 인센티브로 주게 된다. 이 인센티브는 월급 인상분 이외의 추가 수입이기 때문에 앞에서 계산한 물가 대비 생활비 부족분을 이론적으로는 상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농업과 공업 모두 이같은 인센티브제를 도입할 경우 생산량이 증대하기 때문에 물자 부족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인플레 우려에 대한 해답인 셈이다. 그리고 국영상점이 시장가격으로 이들 농산품과 공산품을 취급하게 함으로써 유통망도 정상화한다.



계획경제 효율화 효과도 거둬





국가는 국가대로 터무니없이 낮은 국정 가격 및 배급제 부담에서 벗어남으로써 재정 비용을 덜게 되었다. 따라서 꼭 필요한 분야에서는 오히려 계획경제를 훨씬 더 효율적이고 탄력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부에서 얘기하듯이 북한 당국이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로 전면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조처가 시장경제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중국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조선식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의 개혁 조처는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나. 국내의 한 대북 전문가는 이와 관련해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체제 전환을 지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운용 방식에 국한한 변화인지는 더 지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체제 전환과 운용 방식 변화 사이의 갈림길은 바로 금융 개혁 여부라고 한국은행 박석삼 과장은 지적한다. 과거 중국이나 러시아·동유럽의 사례에서 볼 때 가격 자유화 정책은 반드시 금융 개혁을 불렀다고 한다. 각 생산 단위가 시장 가격에 맞추어 제품을 생산하게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생산 보조비를 지급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국가를 대신해 생산 보조비를 빌려주는 기관이 필요해진다. 그 기관이 바로 상업은행이다. 상업은행이 등장하면 결국 금융 기능이 국가에서 분리해 나오게 되고 이렇게 되면 국가의 기능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시장경제로 본격 이행하는 출발점인 셈이다.



최근의 조처 중에 금융 개혁이 포함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그러나 그 전 단계인 가격 자유화 정책이 이미 시작된 만큼 그것도 이제 시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 90회 생일, 김정일 위원장 환갑이 겹친 올해, 특히 아리랑 축제 직후에 북한측이 뭔가 결정적 전환을 모색할 것이라던 몇몇 전문가의 예측이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지난 50여 년간 걸어왔던 사회주의 계획경제라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라는 낯설고 모험에 찬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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