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무 브로커에서 비리 스토커로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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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연씨 병역 면제 의혹 폭로한 김대업씨는 누구인가
김대업. 그가 주목되고 있다. “이회창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가 이정연씨의 병역 비리에 관련되어 있다.”(7월31일 서울지검 기자회견) 그의 폭탄 발언에 정국이 요동했다. 한나라당은 그를 전과 6범인 파렴치한이라며 인신 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연일 메가톤급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한인옥씨가 정연씨 면제를 위해 천만원 이상의 금품을 건넸다. 관련 진술이 담긴 녹음 테이프가 있다.”(8월2일 sbs 라디오 인터뷰)


김대업씨는 꼭 5년 만에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 병역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왜 민주당 국회의원도 아니고 당원도 아닌 그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제기한 것일까? 이회창 저격수로 등장한 김대업씨는 과연 누구인가?


유도 선수 꿈꾼 경상도 사나이





김대업씨는 한나라당 텃밭인 대구 출신이다. 경상도 사나이인 그는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그는 잘 나가는 유도 선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반대로 김씨는 유도 선수의 꿈을 접고, 1980년 대구의 ㄱ대 무역학과에 합격했다. 김씨는 이때부터 ‘사고’를 치며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함께 유도를 했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는 대구 시내를 주름잡기도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1980년 12월, 김씨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장남인 김씨가 사라지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김씨의 아버지는 군대 내 인맥으로 아들의 소재를 파악했다. 아버지는 강원도 화천까지 그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구명 노력 덕분인지, 그는 6주짜리 훈련만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김씨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특수부대에 지원했다. 특수부대는 돼지부대라고 불리던 북파 공작부대였다. 1981년 7월20일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입영 열차에 혼자 올랐다. 김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입대하는 모습을 보려고 서둘러 가다가, 교통 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김대업씨는 6개월 뒤에 첫 휴가를 나와서야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족과 친지들이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순간에 그는 두 동생과 어머니를 부양하는 가장이 되었다. 김씨는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특수부대에서 나와 군의학교에 들어갔다. 의정 부사관(하사관)으로 국군대구병원 외래과에서 근무했다. 외래과는 신체검사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병무 비리 메커니즘에 눈을 떴다. 그는 사회에 나와서도 병원 관계 일을 하고 싶어 의학을 독학했다. 병무 행정의 실무와 의학 지식까지 겸비하면서 그는 병무 비리 커넥션을 훤히 꿰뚫었다. 결국 1985년 그는 병역 비리에 연루되어 옷을 벗었다.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택시회사를 운영하다, 1992년 군 경험을 살려 의정부시민병원을 설립해 1년6개월 동안 병원을 운영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수공장을 세워 적지 않은 돈을 벌기도 했다. 김씨는 사업을 하면서도, 부업으로 병역 비리에 관여했다.


명예회복 위해 병역 비리 수사 지원


1997년 7월 그는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꼬리가 잡혔다. 청와대 간부를 사칭해 병역을 면제시켜 주겠다며 9천5백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일부 언론은 그의 실명과 함께 병역 비리뿐 아니라 여자 문제까지 공개했다. 이 사건으로 사춘기였던 딸이 충격을 받았다. 당시 그는 딸이 다니던 학교의 육성회장이었다. 그는 복역하는 동안 명예회복을 별렀다. 출감 후 딸이 다니는 학교 앞에서 아침마다 자원 봉사를 하려고도 했던 그는, 교도소에서 신문을 보다 병역 비리 수사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출감 이틀 만인 1998년 7월9일 그는 국방부 감찰부로 전화를 걸었다. “병무 비리 커넥션을 알고 있다. 이번 기회에 새 삶을 살고 싶다. 수사 의지가 있다면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는 병역 비리 전담 감찰관인 이명현 소령과 만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신원조회 결과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병역 비리를 뿌리 뽑자는 데 의기 투합했다. 김대업씨는 수사팀 내에서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3일 동안 밤잠을 안 자고 일할 때도 있어 수사관 모두 혀를 내둘렀다. ‘밤잠을 안 자고 일하는 김대업씨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내가 아는 어떤 수사관도 이 정도로 열의를 보일 수 없었다. 10개월 동안 동고 동락하며 느낀 바에 의하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이명현 소령이 국방부장관 앞으로 보내려고 작성한 내부 보고서 중 김대업씨 관련 부분이다.






김대업씨는 병적기록표만 보고도 병역 비리를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그의 활약은 당시 언론과 국회에도 알려졌다. 이때만 해도 그는 ㄱ씨, 민간인 김모씨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그런 그가 언론에 실명으로 오르내리게 된 것은 지난해 4월이다. 2001년 4월3일 그는 ‘느닷없이’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조 아무개씨로부터 청와대를 사칭해 3억7천만원을 받아냈다는 혐의였다. 김씨는 체포 당시까지 자신이 고소당하고 수배된 사실도 몰랐다. 조씨에게 돈을 빌린 사실은 인정해 조씨와 돈을 갚겠다는 합의서까지 작성했다. 하지만 합의는 깨지고 그는 구속되었다. 이때 체포·구속된 것을 그는 병역 비리 수사를 방해하려는 특정 세력의 보복이라고 여긴다.


지난해 3월30일 그는 서울 신촌의 한 PC방에서 체포되었다. 한 50대 남자가 PC방을 지나가던 순찰차를 세웠다. 그리고 김씨의 사진과 인적 사항이 담긴 메모를 전해 체포를 부탁한 것이다. 김씨가 검찰로 송치된 뒤, 군 정보기관은 검찰이 요청하지도 않은 자료를 해당 검사실을 직접 방문해 전달했다. 12장짜리로 김씨의 전과 및 범죄 혐의 정보가 담긴 문서였다. 김씨는 이 사건으로 1년간 복역했다. 김씨는 복역하는 동안 병역 비리와의 전면전을 다짐했다.


그의 의지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검찰이다. 병역 비리 사건을 전담했던 서울지검 특수1부가 수사가 막히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 1월4일 김길부 전 병무청장 수사에도 그는 참여했다. 이때 김대업씨는 김길부씨로부터 병역 비리 은폐 대책회의가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김길부씨의 증언을 듣는 순간 퍼즐이 맞추어지듯이 분명해졌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3월 만기로 출소하자마자 이정연씨 관련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폭탄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는 7월31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서청원·남경필 ·김영선 씨 등 5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고, 김대업씨는 8월5일 검찰에 출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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