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음’도 ‘색깔’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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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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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양숙 여사, ‘조용한 내조’ 일관…영부인 역할 모델 못찾아
‘화려한 외모도, 대단한 학벌도 없으며, 내세울 만한 가족 배경도 없는 영부인.’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자매지인 격주간지 <환구>는 한국의 새 퍼스트 레이디 권양숙 여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 잡지는 아울러 권여사를 평범한 보통 여자에 만족하는 유형으로 분류하며, 그녀가 앞으로 ‘그림자 내조’를 펼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과연 그럴까. 참여 정부 출범 100일. 권여사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퍼스트 레이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청와대에 들어간 뒤 한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권여사가 공식 일정에 나선 것은 지난 4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대한암협회 명예회장을 잇달아 수락한 것을 필두로 장애인의 날(4월18일) 기념식에 참석하며 본격적인 외부 나들이를 시작한 그녀는 5월 방미 이후 한결 자신감이 붙은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제가 된 것이 지난 5월28일 청와대에서 열린 재벌 총수 부인들과의 오찬. 권여사가 초청해 이루어진 이 날 모임에는 이건희 삼성 회장 부인 홍라희씨(호암미술관장), 구본무 LG 회장 부인 김영식씨,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부인 이정화씨 등 방미 때 노대통령을 수행한 경제사절단 소속 기업인의 부인 30여 명이 참석했다.


영부인과 재벌가 안주인들의 만남에는 위험 요소가 있는 편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옥숙 여사는 자기 생일에 재벌 총수 부인들을 불러들였다가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이런 부담을 무릅쓰고 권여사가 방미사절단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목으로 모임을 추진하자, 일각에서는 드디어 영부인이 그림자 내조를 접고 ‘대통령 제1 참모’ 역할을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여사는 아직 영부인으로서 뚜렷한 역할 모델을 세우지는 못한 듯하다. 일단 ‘30년간 이어온 내조를 충실히 이행하겠다’던 약속을 권여사는 잘 지켜내고 있다. 대통령 사저에 초청받았던 한 국회의원은 그녀가 메모지며 펜을 가져다 달라는 대통령의 시중을 직접 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하루 한 번은 반드시 관저에 나가 업무 보고를 받고 자료를 검토하는 등 영부인 업무를 익히기 위한 노력도 권여사는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다. 권여사는 지난해 한 여성단체가 주최한 대선 후보 부인 초청 토론회에서 “내가 영부인이 된다면, 청와대 내 야당이 되겠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한 일이 있다. 실제로 집권 이후 권여사는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KBS 창사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노대통령은 다음날 아침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아내에게 밤새 ‘야단’맞은 사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권여사는 ‘방송이 없었으면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나’라는 발언이 적절치 못했다며 남편을 비판했다고 한다.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는 최근의 발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권여사가 이에 대해 어찌나 세게 문제 제기를 했던지 노대통령은 다음날 “화가 나서 아침밥도 안 먹고 나오려다 (마음을 바꿔) 먹고 나왔다”라고 볼멘 소리를 했다. 이를 놓고 청와대의 한 직원은, 이른바 정치 감각이나 정치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의 여론을 읽는 감수성은 대통령보다 그녀가 때로 더 뛰어나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권여사 보좌 업무를 맡은 제2부속실에 따르면, 그녀는 여론을 따라잡기 위해 날마다 신문과 방송 뉴스를 직접 꼼꼼히 챙긴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기까지가 전부이다. 대통령에 대한 직언은 물론 대중을 만나 설득함으로써 때로는 대통령 지지율까지 상승시키는 현대적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역량을 권여사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순자 여사를 비롯해 역대 정권의 영부인들이 하나같이 권력형 시비에 휘말렸던 경험부터가 권여사를 주춤거리게 하고 있다. 이를 의식한 듯 권여사는 대통령 당선 직후 ‘조용하고 잡음 없는 청와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의 ‘격정적인’ 캐릭터 또한 권여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집권 후 100일 동안 권여사는 국내외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한 일이 없다. 가정의 달을 맞아 공동 인터뷰를 추진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방미·방일을 앞두고 준비할 것이 많아서였다는 것이 청와대측의 해명이지만, 이보다는 대통령의 언행이 잇달아 여론을 자극하는 국면에서 영부인까지 나서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참여 정부에서마저 영부인용 아젠다가 실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친인척이 연루된 각종 비리 사건으로 정당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전임 이희호 여사는 집권 초반 여성부 창설을 적극 지지하고 결식 어린이 지원 사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정책적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권여사는 아직 자기 색깔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이다. 특히 웬만한 공식 일정은 자제하고 있는 권여사가 보건복지부와 관련된 행사에는 비교적 자주 모습을 비친 것도 괜한 뒷말을 낳고 있다.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이 대선 과정에서 권여사를 수행한 인연 때문이다. 지난 5월4일 대통령 내외와 함께 나란히 골프장을 찾음으로써 권여사의 신임을 다시 한번 과시한 김장관은 지난 5월28일 대한간호협회 80주년 기념식 날 단상에서 영부인을 맞는 ‘파격’으로 다시 한번 화제에 올랐다. 관례에 따르면, 장관이 영부인을 식장에 모시고 입장하게 되어 있으나 이 날은 현관에서 영접만 한 뒤 식장에 먼저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 김장관측의 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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