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자 시절 굳게 다짐했건만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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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출신 인사들, 공기업 임원 자리 잇달아 차지…“무늬만 공모” 비판 거세
낙하산 망령이 되살아나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공기업 임원 인선은 효율성·공익성·개혁성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해 그에 맞게 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과거처럼 특정인의 입김에 따라 인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바로잡고, 시스템에 의한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현재 대부분의 공기업은 사장을 공개 모집하는 방식으로 선임한다. 그러나 집권 4개월을 넘기면서 서서히 정치권의 입김이 공기업 인사에 스며드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무늬만 공모제이지 내용은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 7월3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여의도에 있는 증권거래소 19층에서 열린 증권거래소 회원 총회는 예정되었던 상임감사 선임 건을 상정조차 하지 못하고 끝났다. 노동조합이 10여 일 전부터 ‘정치권에서 낙하산 인사를 하려고 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증권거래소 김병률 노조위원장은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여기저기서 민주당 출신 인사가 거래소 감사로 온다는 얘기가 들린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인사위원장인 김태랑 최고위원은 “당이 청와대에 추천한 인사 가운데 (증권거래소 감사) 해당자가 있다”라고 말했다. 증권거래소 노조 집행부는 낙하산 인사를 반드시 저지하겠다며 7월1일부터 철야 농성을 하고 있다.


증권거래소의 경우는 참여정부에서 공기업 임원 인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전임 윤영호 회장이 6월11일 갑작스레 사임한 마사회는 한 달째 회장이 공석이다. 소관 부처인 농림부 고위 관계자는 한때 추천위원회를 만들어 회장을 공모하겠다고 말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공모하겠다는 것인지 임명하겠다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사회 주변에서는 정부가 회장을 임명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회장을 공개 모집하는 방안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힌 마사회 노동조합은, 만약 정부가 회장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낼 경우 강력한 투쟁에 나설 태세이다.

7월25일 주주총회에서 사장을 선출할 예정인 한국가스공사도 낙하산 인사와 관련해 홍역을 치렀다. 6월9일 긴급 소집된 가스공사 이사회는 ‘퇴직 후 6개월이 넘지 않은 공직자의 이사 취임을 제한한다’는 정관 23조를 삭제했다. 그런데 노조가 산업자원부 공무원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려는 기도라며 강력하게 반발하자, 6월16일 다시 이사회를 열어 삭제한 정관을 되살리고 사장을 공모했다. 가스공사 사장추천위원회는 현재 김종술 가스공사 부사장·오강현 강원랜드 사장·윤영석 두산중공업 부회장 3명을 청와대에 사장 후보로 추천해 놓았다.

주목되는 것은 참여정부의 공기업 임원에 민주당 등 정치권 출신 인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김태랑 최고위원에 따르면, 민주당이 공기업 임원 후보로 청와대에 추천한 사람은 모두 10명이다. 자천 타천으로 당에 추천된 사람은 수백명이지만 대표·사무총장 등 당 4역과 조직위원장·직능위원장·대변인·대통령 특보 등으로 구성된 당 인사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자리를 잡은 사람은 5명이다. 김최고위원은 앞으로 2명 정도가 더 자리를 잡을 것 같다며 공기업 인사와 관련해 청와대에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추천으로 최근 공기업 임원이 된 다섯 사람은 최기선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6월17일), 유 건 관광공사 사장(6월18일), 박정훈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6월23일), 박종권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6월24일), 이성재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6월25일)이다. 이들 가운데 최기선 감사는 유일한 당료 출신으로 민주당 조직국장과 윤리위원회 상임부위원장을 지냈고, 예비역 공군 소장인 박종권 이사장은 민주당 안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박정훈 이사장은 14·15대 때 민주당 의원이었다. 유인학 전 민주당 의원의 동생인 유 건 사장과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성재 이사장은 지난 대선 때 각각 노무현 후보의 정책특보와 복지특보를 지낸 ‘노무현 사람’이다.
당이 추천한 경우는 아니지만 별도 라인을 통해 공기업 임원이 된 민주당 출신 인사도 있다. 대선 때 민주당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 본부장을 지낸 신종관씨는 수출보험공사 감사가 되었고, 국민참여운동본부 행정실장을 지낸 손주석씨는 환경관리공단 관리이사가 되었다.
노대통령의 특보나 민주당 출신이 잇달아 공기업 임원으로 진출하자 노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기용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총리실 산하 연구기관인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원장에 노대통령의 IT정책특보를 지낸 이주헌씨가 임명된 것이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에 신언항 전 보건복지부 차관이 임명된 것도 이런 맥락이라는 것이다.

보건복지위 소속 한나라당 한 의원의 보좌관은 신영수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이 경질된 배경에 괘씸죄가 적용되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경기고 출신인 그가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줄을 섰기 때문에 옷을 벗었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권 실세 그룹 간에도 공기업 임원 인사를 둘러싸고 미묘한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된 김 진씨의 경우. 김씨가 내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 일부 언론은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주택공사 사장에 내정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자 김 진씨여서 그 배경을 둘러싸고 구구한 억측이 불거졌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한씨를 추천했고,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은 김씨를 밀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공기업 사장은 청와대 공모-공기업의 추천위 심사-공기업이 해당 부처에 추천-부처가 청와대에 추천하는 형식을 통해 임명되고 있다. 후보 가운데 최종 압축된 3명이 청와대에 추천되어 그 가운데 1명이 임명된다. 청와대 정찬용 인사보좌관은 공기업 임원 인사 원칙과 관련해 개혁적인 인물, 경영 마인드가 있는 인물, 관리 능력이 있는 인물 등 여러 기준을 적용해 인선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한국관광공사 박철범 노조위원장은 “공모를 하고 추천위원회 심사를 거치는 등 겉으로는 공기업 임원을 임명하는 절차가 과거보다 많이 투명해졌다. 하지만 사전에 내정설이 돈 인사가 그대로 임명되는 등 안으로는 짜고 친다는 얘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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