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국 내각 구성해 드림팀 출발시키자”
  • 김종민 기자 ()
  • 승인 200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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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위기 타개책으로 떠올라…‘책임 경제 총리제’ 도입 주장도
민주당의 한 인사는 DJ를 ‘파격이 없는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이 표현에는 불안정한 정국과 눈에 띄게 차가워지고 있는 민심을 타개하려면 파격적인 수습책이 필요하지만, 그동안의 DJ 정치 스타일을 볼 때 기대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담겨 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노르웨이로 떠나던 지난 12월8일 김대중 대통령은 출국 인사에서 “시상식을 마치고 귀국한 뒤 국민 여러분이 바라는 국정 개혁을 단행하겠다”라고 밝혀 이른바 ‘오슬로 구상’에 일말의 기대를 품게 했다.

초점은 단순한 당정 개편 수준을 뛰어넘는 조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당정 개편 주장에 대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약효는 기껏해야 한두 달도 못 갈 것이다”라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는 그런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근본적이고 파격적인 정국 전환 카드가 나와야 한다면서, DJ가 과감하게 당적을 버리고 거국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도 지난 7월부터 줄곧 “난국 극복과 국정 쇄신을 위해 ‘코리아 드림팀’을 짜자”라며 거국 내각 구성을 주장해 왔다.

정무수석실, 거국 내각 리포트 작성?

최근 청와대에서도 거국 내각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무수석실에서 거국 내각 리포트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한 수석비서관이 거국 내각을 주장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이디어 차원이기는 하지만 민주당·한나라당·자민련·중립 인사 구성 비율을 4 대 2.5 대 2.5 대 1로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거국 내각을 주장하는 이들의 핵심 논거는 ‘리더십 위기’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구조 조정과 남북 화해 등 수십 년 묵은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환기를 거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통합적이고 신뢰도 높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여야 정치권은 각종 이해 당사자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통합하면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DJ 정권이 소수파여서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할 권위와 힘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다.

물론 DJ 정부도 집권 후 지금까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정권 초기에는 야당 의원을 영입해 공동여당이 과반수를 넘겼고, 영남으로 진입하기 위해 동진정책을 펴기도 했다. 물밑에서 정계 개편을 위한 노력도 전개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지난 4·13 총선에서 민심은 또다시 여소야대 상황을 만들었다. 정권 초기와 달리 이제는 인위적인 정계 개편이나 야당 의원 빼오기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민련과의 공조도 불투명해졌다. 집권 세력의 국정 주도력은 급속히 약해졌고 결국 의료 대란을 필두로 각종 이익 집단의 반발은 거세지고, 운영위 국회법 날치기 통과, 검찰총장 탄핵안 실력 저지 등 ‘몸으로 때워야만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경제를 살리고 구조 조정을 밀고 나가기 위한 공적 자금을 집행하려 해도 야당의 까다로운 승낙을 기다려야 하는 처량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리더십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초당적 협력 체제를 구축해 국정의 중심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 거국내각론의 골자다. 물론 거국 내각과 같은 시스템 변화가 없이도 여야가 상생의 정치를 편다면 리더십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장달중 교수(서울대·정치학)는 총선 민의를 근거로 ‘소수 지배 노선’을 제시했다. 집권당이 소수당임을 인정하고 야당과 적극 대화하고 타협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민의에 부합하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미국 클린턴 정권이 집권 8년 동안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과 타협하고 설득해 국정을 차질 없이 운영해 온 것이 모델이 될 만하다. 클린턴은 여소야대 상황에서도 의료보험법안과 같은 경우는 공화당의 문제 제기를 수용해 타협안을 만들어 통과시켰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화당 의원들을 개별 접촉해 설득해 냈다. 1995년 공화당이 예산 통과를 지연시켜 연방 정부가 세 번씩이나 업무를 중단해야 하는 위기에 몰리자 여론에 호소해 상황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국 내각을 주장하는 이들은, 차기 대권을 놓고 무한 정쟁을 벌이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여야가 미국과 같이 자연스럽게 설득과 타협의 관계를 맺는 것은 쉽지 않다고 반박한다. 특히 대통령이 한 정파의 대표로서 정권 재창출에 집착하고 있는 한 여야가 상생 관계로 가기는 어려우리라는 진단이다. 호남에 기반을 둔 소수파인 DJ 정권이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대통령이 초당적 위치에서 거국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 조건이라는 것이다.

거국 내각 구성은 정치 구도의 변화를 수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민감한 사안이다. 현재의 민주당·한나라당 대결 구도는 친DJ와 반DJ를 ‘유일한’ 기준으로 해서 짜여 있다. 만일 DJ가 초당적 위치로 이동하고 거국 내각을 구성하면 반DJ 기치를 내걸고 일치 단결해 온 한나라당에 원심력이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거국 체제가 구성되면 야권의 개혁 세력이 동참할 것이라고 내다본 김덕룡 의원이나, 정계 개편에 관심이 많은 김윤환 민국당 대표 모두 거국 내각과 정계 개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국 내각에 대한 여야 지도부의 반응은 아직 시큰둥하다. 여권은 대통령의 당적 이탈 이후 예상되는 민주당의 혼란과, ‘2년 만기 어음’을 들고 있는 이회창 총재에게 인사권이라는 ‘현찰’을 넘겨준다는 점이 못내 불안하다. 이총재로서도 거국내각안이 수권 능력을 보여주고 다른 차기 후보들과 격을 달리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데 따르는 부담과 한나라당의 내부 분열 가능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의 권위·신뢰 회복할 마지막 기회

여야 지도부가 각각 나름의 사정 때문에 거국 내각에 소극적이지만,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거국 체제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또한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거국 내각에 준하는 여러 가지 방안이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함성득 교수(고려대·정치학)는 “야당에 장관 몇 자리 주는 ‘무늬만 거국 내각’은 의미가 없다”라면서, 거국 내각의 변형된 형태인 ‘책임 경제 총리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여야가 정파적 판단을 떠나 가장 적합한 인물을 경제 총리로 세우고, 대통령은 경제 총리에게 경제 부처 장관에 관한 실질적인 제청권 등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초당적으로 지원해 구조 조정과 경제 살리기를 지휘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하순봉 한나라당 부총재도 ‘경제 비상 내각’을 주장해 왔고, 이총재도 12월7일 원광대 강연에서 “경제 각료와 참모 진용을 개편하라”고 요구한 것을 보면, 한나라당으로서도 관심을 보일 만한 제안이다. 임혁백 교수(고려대·정치학)도 “경제·남북·지역 감정 문제와 같이 당파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고, 여야 정권 교체가 되더라도 다음 정권에서 계승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여야의 협치(協治)가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DJ는 민주당의 안정, 국정 쇄신과 민심 수습, 조기 레임 덕 진화, 차기 정권 재창출 등 국가적 과제와 당파적 이해를 모두 만족시키는 안을 찾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나름대로 시국 수습책을 내놓은 사람들의 처방은 각기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의견은, 지금이 DJ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권위와 신뢰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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