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은 기본, 손찌검은 보너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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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 언행으로 빛난 2003년 정치 ‘꼴불견 장면’ 10선
10명 추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올 한 해 여의도에는 꼴불견 정치인이 넘쳐났다. 지난해 대선을 치르며 한국 정치 수준이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유권자들은 또다시 맞닥뜨린 이같은 문화 지체 현상에 더 힘들고 짜증이 났다. 특검법을 둘러싼 잇단 국회 파행이며, 민주당 분당 사태로 어수선했던 올해 ‘막가파식’ 말과 행동으로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정치인 10명을 꼽아 보았다. 단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은 이번 선정 대상에서 제외했다.

영화에서처럼 ‘결정적 장면’을 뽑는 것이 허용된다면 2003년 정치권의 결정적 장면은 단연 이 장면일 것이다. 민주당 분당 사태 와중에 한 여성 당직자가 이미경 전 의원의 머리채를 전광석화처럼 낚아채던 장면.
이미경씨의 머리채를 잡아당긴 이는 민주당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문팔괘씨이다. 한때 서울시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문씨는 이 날 이후 언론으로부터 ‘공포의 여전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8월 14·28일, 9월4일로 이어진 아수라 당무회의에서 문씨의 활약은 늘 도드라졌다. “오늘은 문여사가 왜 조용하지?” 기자들이 수근거릴 때마다 그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상대방 넥타이 나꿔채 목 조르기, 신고 있던 하이힐 벗어 휘두르기, 높은 데 올라가 물 뿌리기 등등 문씨가 구사한 전술은 다종다양했다.

DJ와 동교동계가 풍찬 노숙하던 시절부터 온몸을 바쳐 민주당을 지켜온 당원들의 안타까움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어쨌거나 이 날 당무회의에서 연출된 ‘엽기적 난투극’으로 민주당 신당파와 구당파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최근 문씨는 권노갑씨 재판에 종종 참석해 법조 출입 기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는 후문이다.

카지노를 사랑한 의원, ‘아니면 말고’ 의원

열린우리당 송영진 의원은 10월말 내국인 출입이 제한된 미8군 카지노에서 도박을 벌인 사실이 들통 나 서민들에게 허탈감을 주었다. 도박도 도박이지만 이 사실을 특종 보도한 <동아일보>가 증거 사진을 들이밀 때까지 “그 날 밤 미8군 카지노에 간 일이 없다”라며 시치미를 뗀 송의원의 태도는 괘씸죄를 적용해 마땅했다.
깨끗하고 개혁적인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은 송의원 스캔들로 말미암아 출발부터 이미지에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더욱이 지난해 후단협으로 활동했던 송의원을 신당 쪽으로 끌어들일 때부터 비난을 받았던 당 지도부는, 이른바 블랙잭 파동 이후에도 송의원을 출당시키지 않고 감싸서 빈축을 샀다. 심지어 ‘신당에 재를 뿌리려고 누군가 송의원을 일부러 함정에 빠뜨렸다’는 음모론까지 횡행했으니, 송의원의 앞날은 당분간 태평무사일 듯하다.

뉴스메이커로 통하는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을 잘못 건드렸다가 혼쭐이 났다. 지난 3월 김홍신 의원이 유시민 의원 후원회에 참석해 축사를 한 것을 문제 삼으며 김의원을 출당시키라고 주장할 때부터 두 의원의 인연은 꼬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10월 초 국회 본회의장 발언대에 선 김무성 의원이 유시민 의원의 중국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 방문설을 제기하면서 두 사람간 갈등은 폭발했다.
상대의 출입국 기록조차 확인하지 않고 ‘아니면 말고’식 의혹을 제기한 김의원은 그 뒤 “국회의원 면책특권이 ‘막말 허가서’냐”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공개 사과도 소용없었다. 유시민 의원은 사과는 사과로 받아들이되, 면책특권의 한계를 이 기회에 가려 보자며 허위 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김의원을 형사 고소했다.

이로써 김의원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막말로 곤욕을 치른 셈이 되었다. 지난해 김의원은 당시 현직에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겨냥해 “미국에서는 김대통령 유고 가능성이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가 파란을 일으켰다.

이상배 의원의 막말도 빼놓을 수 없다.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을 맡고 있던 지난 6월, 이의원은 방일(訪日) 외교 중이던 노대통령을 겨냥해 ‘등신 외교’라는 기발한 조어를 선보였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의원은 뒤늦게 공개 사과를 했지만, 앞으로 누군가 자기 당 내지 자기 당 소속 의원을 ‘등신 당’ ‘등신 의원’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이의원 발언 파문이 확산되자 “등신이라는 말이 뭐가 나쁘냐”(김덕룡 의원) “등신이라는 용어가 경상도 정서로는 꼭 비하적인 의미만은 아니고 애교 섞인 표현이다”(이상배 의원)라고 극구 해명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박주천 사무총장은 이른바 개구리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다. 지난 8월, 주요당직자회의를 하다 말고 김병호 홍보위원장이 “시중에 ‘노대통령과 개구리의 닮은 점 다섯 가지’ 얘기가 나돌던데 들어봤느냐”라며 우스개를 꺼낸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 시도때도 없이 지껄인다, 가끔 서글프게 운다.” 3개 항목을 늘어놓다가 김위원장의 말문이 막히자 박총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생긴 게 똑같다”라며 그를 도와 대미를 장식했다.

원내 제1당 사무총장이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 치고는 함량 미달인 이 발언을 놓고 인터넷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한나라당과 청개구리의 닮은 점 다섯 가지’ 등등 성난 네티즌들이 급조한 온갖 동물 시리즈로 한나라당은 본전도 못 건지고 말았다.

국회 수준 드러낸 ‘개구리’ ‘양가 아저씨’ 발언

자민련 조희욱 의원은 올 정기국회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라 할 만하다. 단 조의원은 본명보다 ‘양가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졌다.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있던 날 그가 윤후보의 고교 시절 성적표를 공개하며 “수학(성적)이 전부 양 아니면 가야. 아주, 양가 아저씨야!”라고 질책한 것이다. 상식적 판단을 하는 보통 사람들은, 광주일고·고려대를 나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는 사람이 결국 “제가 성적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해야 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에 기가 막혀 했다. 정기국회에서 또 물의를 빚은 인물이 열린우리당 천용택 의원이다. 분당을 앞두고 민주당이 찧고빻는 와중에 구당파 당원들로부터 툭하면 멱살을 잡힌 사람이 천의원이었다. 하다못해 신당파 핵심인 천정배 의원과 같은 천씨라는 이유로 드잡이를 당한 일도 있었다.

대신 9월 국정감사 때 천의원은 지역 편중 인사 시비를 벌이던 중 “왜 자기가 나서 ×랄이야, 발언 책임질 수 있어?”라는 막말로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을 공격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천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 때도 “이회창이 (대통령) 되면 나 이민 갈 거야”라고 했다가 한나라당 하순봉 의원과 “인간 말종” “이 ××야” 등등 험한 말을 주고 받은 일이 있다.

이들에 필적할 만한 정치권 주변 인사라면,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장관 정도가 꼽힐 듯하다. 최장관은 “대통령은 태풍 때 오페라 보면 안 되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선생님들이 많은데 그중 몇 놈이 (교장에) 올라가도 아무 소용없다” 등 좌충우돌형 어록을 쏟아내다 취임한 지 14일 만에 경질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열린우리당 이상수 의원이나 민주당 이용삼 의원은 오락가락하는 말로 물의를 빚은 대표적 정치인이라 할 만하다. 지난해 선대위 총무본부장을 맡았던 이상수 의원은 “지난 대선 때 100대 기업을 다 돌았고, 당 후원금 1백20억원을 모았다”라는 발언을 필두로, 말을 꺼낼 때마다 대선 자금 규모가 조금씩 달라져 “앞으로 보면 이상하고, 뒤로 보면 수상한 사람이다”(홍준표 한나라당 의원)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런가 하면 민주당 원내 대표 경선에 나섰던 이용삼 의원은, 경선 당일(12월12일) 후보 사퇴를 전격 선언함으로써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의원이 내세운 사퇴 사유는, 자기를 밀어주겠다며 경선 출마를 권유했던 한화갑 전 대표가 자기 계보 사람인 설 훈 의원의 출마를 묵인 내지 방조했다는 것이었다. 사퇴를 선언하던 날, 이의원은 계파 정치·보스 정치의 부활 조짐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앞으로 당내에서 신(新) 정풍운동을 펼치겠다고 했다. 그러나 계파 정치를 비난한다면서 특정 계파가 자기를 밀어주지 않는다고 후보 직을 사퇴한 그의 행동은 앞뒤가 영 맞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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