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청문회 ‘역풍’ 두렵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8.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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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겉으론 강경, 속으론 뜨끔… YS 출석 원치 않는 듯
김대중 정권의 첫해 마지막 고비는 아무래도 경제 청문회가 될 것 같다. ‘양날의 칼’‘마술 피리’로 불리는 경제 청문회에 전·현직 대통령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맞물려 있는데다 여야 정치권 전체가 깊숙이 빨려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상황 전개 여부에 따라 정치권의 지각 변동을 촉발할정도로 상황은 급박하게 굴러갈 수 있다.

현재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정 안되면 여당 단독으로 청문회를 강행하겠다’는 데 비해 한나라당은 ‘그렇다면 몸으로 막겠다’는 완강한 입장이어서 양측은 정면 충돌 일보 직전이다.

한나라당 민주계의 입장은 단호하다. 상도동의 창구역을 하고 있는 신상우 국회 부의장은 최근 한 달 동안 대통령만 빼고 청와대와 국민회의 고위 인사들을 두루 만나 ‘경제 청문회 3불가론’을 주장했다. 첫째, 때를 놓쳤다. 둘째, 경제 회생에 무익하다. 셋째, 여당에도 도움이 안된다.

그러나 여권은 외형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경제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김대통령은 12월2일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나 같으면 나가겠다’는 식으로 YS에게 청문회 출석을 우회적으로 요구했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이 경제 청문회 개최를 이토록 강하게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외적인 이유는 ‘과거의 잘못된 경제 정책들을 파헤쳐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다. 특정인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밝혀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논리다.

청와대가 11월 말 전국 천여 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직접 출석해 증언해야 한다’는 주장이 72.8%(부산·경남 63.2%), 경제 청문회의 효과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64%로 높게 나온 것도 여권 핵심부로 하여금 경제 청문회에 자신감을 갖게 만든 요인이었다. 명분과 실리 면에서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권이 청문회를 열기로 작심한 이면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배경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즉 고도의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는 경제 청문회를 단순히 ‘교훈 찾기’만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민심 수습론.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거리로 내몰린 실업자들은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 YS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현재의 우울한 경제 현실에 대해 내심 불만을 품고 있다. 이같은 국민들의 불만을 완화하고 표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YS 다시 때리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계 흡수론. 민주계를 압박해 여권으로 끌어들이는 이른바 민주 대연합 작전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청문회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을 당한 뒤 오갈 데 없어질 경우 민주계가 끝내는 여당의 품으로 투항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결국 여권으로서는 경제 청문회를 통해 교훈도 얻고 민심도 돌리고 민주계도 영입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음직하다.

그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것이 정치다. 특히 청문회가 갖는 독특한 특성과 자가 발전력을 감안하면 그 결과는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거대한 럭비공과도 같은 경제 청문회의 방향이 결코 김대통령과 여권이 바라는 대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청와대 참모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대목도 청문회가 몰고올 돌발성 또는 역풍이다.

그 가운데 핵심은 역시 YS 출석 문제. 만약 YS가 증언대에 설 경우 청문회는 정치 대결장이 될 수밖에 없고 여당에도 불똥이 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YS의 출석을 강하게 요구해 온 여론이 일거에 여권을 향해 ‘해도 너무한다’는 쪽으로 급선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YS 시절의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이 단적인 예다. 당시 여론은 전두환씨 구속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막상 그가 고향 합천에 내려갔다가 꼭두새벽에 거의 잠옷 차림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언론에 비치자 민심은 해도 너무한다는 쪽으로 변했다.
정책 실패 ‘공동 책임론’ 큰 부담

그런 전례를 활용하려는 것일까? 정가 주변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부산이나 고향인 거제도로 낙향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YS를 강제로 국회 증언대에 세울 경우 여론, 특히 부산·경남 민심이 어떻게 돌변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민주계 의원들은 벌떼처럼 YS방어에 나서고, 궁지에 몰린 YS가 어떤 폭탄 발언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하다. YS가 출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YS가 청문회에 나올 리 만무하다. 아마 비디오 증언조차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여권 수뇌부가 YS에게 청문회 출석을 요구하고는 있지만, 출석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 눈치다.

김대통령이 12월2일 인터뷰에서 YS 증인 출석을 시사한 발언에 대해서도 청와대의 관계자는 “총론적인 언급일 뿐 YS가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한화갑 총무도 얼마 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전직 대통령을 예우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등 YS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권의 이런 기류를 종합하면, 겉으로는 YS 증언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굴러가다 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청문회의 속성이기도 하다. “아니, 5공 청문회 때는 전두환씨를 국회 증언대에 세우고 싶어서 세웠나. (청문회를) 하다 보면 YS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 한 여권 인사의 말대로 YS를 불가피하게 청문회장에 끌어내게 되는 상황이 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이번 청문회의 잠재적 폭발력이 있다.

문제는 또 있다. YS가 청문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여권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경제 청문회의 주된 타깃이 YS와 민주계라고 하지만, 현정권의 핵심부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이 지난해 외환 위기에 적지 않게 관련되어 있어 공동 책임론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과 김중권 비서실장, 박태영 산업자원부장관, 고 건 서울시장, 임창렬 경기도지사 등 한나라당이 증인으로 신청한 68명 가운데 3분의 1이 현재 여권에 몸담고 있다. 특히 경제부총리를 지낸 임창렬 지사의 경우 야당이 주된 공격 목표로 벼르고 있다.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여당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9월 IMF 구제 금융에 들어가기 두 달 전, 강경식 경제팀은 금융 감독 기구 통합을 골자로 하는 금융 개혁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으나 국민회의와 자민련 등 야권의 반대로 법안 처리가 무산되었다. 그런데 그때 금융개혁안이 통과되었다면 한국은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구제 금융을 받을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96년 12월 한나라당이 날치기 처리한 노동법의 경우만 해도 국민회의가 결사 반대했으나, 국민회의는 집권 이후 그 가운데 정리 해고 부분을 수용했다. 이 또한 여권이 환란 책임론의 덫에 걸릴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한나라당이 청문회 전사로 내세운 의원들의 면면을 보면, 이사철·김문수·이재오·안상수·이원복 의원 등 한결같이 입심 센 소장 강경파이다. 이미 지난 국정 감사에서 강골의 위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 이들이 ‘여당 공동 책임론’을 제기할 경우 청문회는 여야간 정치 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권의 또 다른 고민거리는 정책적 판단을 사법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원초적인 문제다. 정책을 잘못 집행해 경제난을 자초한 데 대해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의 한 참모는 “애당초 사법적인 책임을 묻기 위해 여는 청문회가 아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된다”라며 청문회의‘정치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정책적 판단을 국회 청문회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전례를 남기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전례를 적용하면 5대 그룹 구조 조정 등을 추진하고 있는 김대중 정권의 ‘IMF 처방’도 퇴임 후 청문회 대상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YS 보호 못하는 한나라당 속사정

물론 한나라당은 김대통령과 여권보다 훨씬 많은 부담을 안고 있다. 국민들이 한나라당을 ‘나라 망친 당’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분위기 속에서 경제 청문회가 열리면 당하는 쪽은 아무래도 한나라당일 가능성이 높다. 또 YS를 계속 방어하자니 ‘나라 거덜낸 장본인을 결사적으로 보호하려는 이유가 뭐냐’는 비판 여론에 직면할 수 있다. 만약 YS가 증언대에 서게 될 경우 민주계가 이총재에게 책임을 돌리면 한나라당은 급격한 내홍에 휘말릴 소지가 높다. 이래저래 한나라당이 청문회 자체에 미온적인 것은 애당초 ‘불리한 게임’이라는 점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YS가 증언대에 나서기를 정말로 바라는 것일까. 김대통령이 겉으로는 강경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제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제 청문회 증언대에 서는 ‘불행한 선례’를 남기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것이라고 보는 여권 인사들이 적지 않다.

“국민에게 한 약속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않은가. 어떤 형태로든 한번은 넘어야 할 고비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실보다 득이더 많다는 것이 우리 판단이다.” 청와대 관계자의 이 말은 이번 경제 청문회의 정치적 성격을 솔직하게 드러내 준다. 다만, 여야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은 청문회 특유의 돌발성과 파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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