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민주계가 설 땅이 없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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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력 갈수록 약화…김윤환 대표체제 맞아 설 땅 더 좁아져
최형우·서석재·김덕룡. 흰머리가 유난히 많아 ‘백발의 트로이카’로 불리던 민주계의 세 실력자는 요즘 말이 없다. 두 사람은 지역구에, 한 사람은 산사에 파묻혀 있다.

사실 민주계의 침묵과 자중은 강요된 측면이 많다. 6·27 지방 선거 참패와 서석재 전 장관의 4천억 비자금 발언 파문, 신3김 시대의 도래 등은 한결같이 민주계가 설 땅을 축소시킨 악재이다. 지금 민주계는 겉으로 태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극도의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상황이 그래서인지 민주계 중진들의 결속력도 예전 같지 않다. 지난 8월19일에 열린 김동영씨 4주기 추모 모임에 이들 세 사람은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로 불참했다. 민주계가 총집결해 집권 세력의 위세를 과시했던 이전의 추모 모임 분위기와는 판이했다. 이날 모임에는 서청원·김운환·유성환·박종웅 의원 등 소장파 몇명만 다녀갔을 뿐이다.

중진 실세 3인은 이날 오전에 열린 당무회의에도 불참했다. 김덕룡 총장 체제에서 민주계 실세들이 회의 분위기를 휘어잡던 두달 전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민정계 대표에 민정계 총장 그리고 민정계 총무와 정책위의장, 정무장관이 포진한 당무회의 풍경은 마치 민정당 시절의 회의를 연상케 했다.

상당수 민주계 의원들은 민정계가 서석재 전 장관의 4천억 비자금 발언을 정치 공세의 호재로 이용했다는 ‘혐의’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민주계의 한 재선 의원은 “발언의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서장관 사퇴설을 흘린 의도는 뻔하지 않는가. 서장관의 실수에 쾌재를 부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계 일각에서도 서씨의 실언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사람이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민주계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는 불만 때문이다.

가뜩이나 민주계의 처지가 어려운 판국에 새로이 들어선 김윤환 대표 체제로 말미암아 민주계가 운신할 폭은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김윤환 대표는 ‘과도기 관리자’에 불과했던 이춘구 대표와는 격이 다른 당내 보수파의 중견 실세인 만큼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소장파들 “우리에게 기회 달라”

민주계 중진들이 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김윤환 체제에 대한 불안감은 이만저만하지 않다. 소장파의 불만은 더욱 심하다. 당의 개혁 이미지를 퇴색시킬 수밖에 없는 김윤환 대표 체제로 과연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볼멘 소리가 공공연히 오간다. 민주계의 한 소장 의원은 “개혁으로 승부를 걸지 않으면 또다시 6·27 참패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 안정 희구 세력이란 없다. 대다수 국민은 변화를 원한다. ‘안정이냐 혼란이냐’라는 40년 묵은 구호로 선거 전략을 짜는 민정계 인사들과 도저히 당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번 지방 선거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말했다.

민주계 소장파는 상도동 선배 그룹인 ‘민주계 1세대’에게도 화살을 돌리고 있다. 요직을 지낼 만큼 지냈고 그 과정에서 실언·실책을 너무 많이 저질렀으니 앞으로는 전면에 나서지 말고 ‘민주계 2세’들에게 바통을 넘겨 달라는 바람이다. 소장파의 의견을 종합하면 ‘민정계의 대대적인 물갈이와 민주계의 과감한 개편만이 김대통령과 민자당이 살 길이다. 그동안 민주계 중진들은 B학점도 받지 못했다. 민주계가 무능하다는 인식을 깨기 위해서는 실력 있고 참신한 민주계 소장파를 과감히 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계 소장파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증진들은 한마디로 어림없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인다. 최형우 의원을 비롯한 민주계 중진들은 ‘정치인 가운데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당내 역학 관계에 의해 잠시 수세에 놓인 것을 능력 부족이라고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서석재 전 장관의 한 측근은 4천억 발언 파문에 대해 “어차피 누군가 열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였다. 총선 전에 총장을 맡았더라면 더 큰 화를 입었을지 모른다. 이번에 액땜한 셈 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민주계 중진들이 세력 회복을 위해 넘어야 할 고비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도동의 2인자’로 불리는 최형우 의원의 경우, 많은 권력을 행사한 만큼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내무부장관과 당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대표 폐지론과 이회창 전 총리와의 충돌, 행정구역 개편설 등으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민정계로부터 ‘공적 1호’로 지목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말미암았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최의원의 충성심과 저돌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재중용되리라는 전망이다. 차세대 주자를 향한 야망이 의외로 강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최근 이미지 개선 작업에 열심이다. 8월 들어 거의 부산에 상주하고 있는 그는, 지역 언론·종교계 인사들과 활발히 접촉하며 현지 민심 추스르기에 한창이다.

반면 서석재씨는 워낙 타격이 커서 빠른 시일 내에 일선에 투입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동해 후보 매수 사건이 국민의 뇌리에서 채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천억 비자금 발언을 하여 ‘실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계 일각에서는 15대 총선이 끝나면 당이 ‘조직의 명수’인 그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서씨의 한 측근은 “민자당이 총선에서 패하고 정권의 목에 비수가 들어오는 위기 상황에서 아무도 사무총장이라는 골치 아픈 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대통령이 안심하고 당을 맡길 사람은 서씨밖에 없다”며 그의 재기를 장담했다. 서씨는 8월20일 현재 강원도 산사에서 칩거하고 있다.

“총선이 최대 고비” 지역구 관리 열중

처지가 어렵기는 김덕룡 의원도 마찬가지이다. 지방 선거 참패의 책임은 그의 몫이고, 설상가상으로 지역구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터져 지역구민 백여 명이 변을 당했다. 지역구 민심이 거의 극에 달하리만큼 흉흉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의원은 집권 후반기 비서실장감으로 거론된다. 그는 요즘 매일 새벽 5시30분부터 지역구를 샅샅이 돌아다니고 있다.

민주계 중진들의 또 다른 문제는 서로 간의 반목과 갈등이다. 민주계 실력자들 간에 미묘한 파워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려진 것은 오래 전 일이다. 몇몇 민주계 인사는 “민주계 실세들의 힘 겨루기는 민정·민주계간 계파 갈등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말했다. 최의원과 김의원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정치권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최장관은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 관계가 돈독한 반면 김의원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의원과 현철씨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한다.

서 전장관은 최의원이나 김의원에 대해 꽤 서운한 심정을 갖고 있다. 동해 사건 이후 최·김 의원을 비롯한 민주계 중진들이 대통령에게 구제를 건의하기는커녕 ‘측근에게도 법집행의 엄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번 4천억 발언 파문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누구 하나 서씨를 엄호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씨측은 특히 최의원에 대해 ‘앞으로 후계 구도 논의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누를 끼칠 사람’이라며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청와대내 민주계 실세인 이원종 정무수석과 홍인길 총무수석 역시 김윤환 대표 체제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다. 대통령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김윤환 체제는 그들의 앞날에 유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홍수석은 민주계 중진들의 재등용 가능성에 대해 “조금 쉬었다 다시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소장파 일각의 민주계 세대교체론에 대해서는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민주계 인사들은 15대 총선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당내 물갈이가 이뤄지고 그때 민주계 중진 실세들이 복귀하면서 당정의 주도권을 잡을 것으로 본다. 문제는 민주계가 얼마만큼 15대 총선에서 살아 남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민주계 의원들은 대부분 지역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계 소장파인 강삼재 의원은 “김영삼 정권 출범에 따른 지역민들의 기대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민심이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다. 지역구 여론이 너무 험악하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래서 김덕룡·서청원·백남치 의원 등 대다수 민주계 의원은 아예 지역구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제 민주계는 김대통령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 대통령이 당을 직접 챙기지 않는 한 자신들의 입지를 보장 받기 힘들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는 듯한 모습이다. 김대통령이 자신의 친정 체제 전략을 당내 계파 화합 카드와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민주계의 운명, 나아가 김대통령의 정치 운명이 거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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