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리더 시리즈 ⑩ / 이인영 열린우리당 의원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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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 평등 위한 ‘3부작 정치’ 쓴다
이인영 의원은 당선된 후에도 신분증을 보이고 국회 의원회관에 들어갔다. 그것도 일반 면회객이 이용하는 후문을 통해서다. 두 번째는 그를 알아본 국회직원의 안내로 그냥 들어갔지만, 나갈 때는 또 후문을 이용했다. 자신이 출입증 없이도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라는 게 낯설어서다.

의원회관에 마주 앉은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민족·민주·계급 따위의 운동권 용어가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1980년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런 자신을 두고 그는 ‘초보 운전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을 찬찬히 뜯어보면 신중한 중견 정치인을 보는 듯하다. 그는 확실한 파병 반대론자다. 심지어 빠른 시일 안에 서희·제마 부대도 철수해야 한다고 믿는 극단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앞장서거나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먼저 주장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추가 파병을 막을 수 있을지 구체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김선일씨 피살 소식이 알려진 직후 정치권 내 파병 반대자들에게 ‘이라크 파병 중단 및 재검토 결의안’ 제출을 2~3일만 늦추자고 제안했다. 파병 반대 여론이 비등해지는 틈을 타 서명 의원을 좀더 늘릴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비록 그의 제안은 하루라도 빨리 결의안을 내야 한다는 ‘선명파’에 밀려 묵살되었지만, 그는 지금도 어떻게 하면 국회의원 절반을 설득해 파병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지 골몰하고 있다.

이처럼 ‘운동권’ 출신인 그가 대중적 합의나 지지세 확보 같은 현실 코드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6·10 항쟁의 경험 때문이다.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투쟁을 진두 지휘한 그는 “6·10 항쟁은 박종철 고문 치사-4·13 호헌 조치-이한열 사망과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만 만들어진 게 아니다. 사회 저변에 ‘새로운 것’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모름지기 지도부는 확고한 사상 무장도 좋지만,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그때 체득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두 달 후 출범한 전대협 1기 의장에 취임하고서도 대중과의 호흡을 최우선으로 강조하곤 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민족·민주 정치’라고 대답했다. “학생 때, 그리고 전민련·전국연합 활동을 10년 넘게 하면서 늘 고민했던 게 민족 모순, 계급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치권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그렇게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다만 이 또한 점진적으로 접근할 계획이다. 10년을 목표로, 1단계는 평화와 복지 교육에 치중하고, 2단계로 통일과 평등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10년 후쯤이면 ‘통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우리에게 던져질 직접적인 화두가 되리라고 예상하면서, 그 전에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계급 갈등도 최대한 해소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요즘 이라크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나, 국회 교육위원회에 자원해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전념하려는 것도 다 민족·민주 정치의 출발인 셈이다.

김근태 대통령 만들기 꿈꾸는 ‘리틀 김근태’

이외에도 정치인 이인영의 꿈은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6월 항쟁 20주년이 되는 2007년, 전태일-5월 광주-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를 필름에 담아내는 일이다. 의외로 영화에 관심이 많다는 그는 1980년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큰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며 웃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정치 사부인 김근태 장관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의원이 김장관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감옥에 있다 나왔을 무렵이다. 그때 이후 그는 그해 11월 창립한 전민련에서부터 지금도 운영 중인 김장관의 개인 연구소 ‘한반도재단’에 이르기까지 내내 행보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리틀 김근태.’ 김장관이 가는 방향과 생각의 틀이 자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그는 이제 즉자적 대중에서 성찰적 대중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만큼, 튀는 정치인이나 이벤트 잘하는 정치인보다 김장관처럼 우직한 정치인이 더 빛을 발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6·10 항쟁 20주년과 차기 대선은 모두 2007년의 일이다. 17대 국회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3년 후 그의 세 가지 소망이 어떤 결실로 나타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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