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는 이인제, 당 밖에서 승부 건다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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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권 주자들 상승세에 위기감…
민심 투어·과외 공부·이미지 변신으로 '비토론 깨기' 나서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변신하고 있다. 정기국회 이후 10여 차례 외부 강연을 다니면서 워밍업을 마친 그는 2월부터는 본격 '민심 투어'에 나섰다. 2월6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진행된 충남 당진의 설해 피해 복구 현장 방문이 그 시작이다. 대구와 경기도 문산에서도 비슷한 '투어'를 준비 중이다. 또한 2월21일부터 1주일간 그는 중국을 방문한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다녀온 지 20여일 만에 다시 외유다.

특이한 것은 이위원의 최근 활동 대부분이 당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그는 당내 입지를 확보하는 데 집착했다. 그러나 최근의 그는 당내 정치를 관심사에서 제쳐둔 듯한 모습이다.

이같은 이위원의 행보에 대해 이위원 측근들은 '민생과 통일·외교를 동시에 챙기면서 유일한 대권 주자라는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대세 굳히기 차원의 행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안에서는 거꾸로 위기감의 발로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위원은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해 왔다. 최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의 맞대결에서도 여러 차례 이긴 바 있다. 그런 이위원이 왜 위기감에 휩싸였을까.

이위원이 위기감을 느낄 만한 징후들은 지난해 8월31일 전당대회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으면서도 3위인 김중권 대표에게 겨우 1% 앞선 2위를 차지했다. 여론조사 결과와 당심(黨心)은 별개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전당대회 이후 민주당 안에서는 차기 대선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했고, 이인제 비토론을 업고 영남후보론이 세를 얻기 시작했다. 이위원이 11월 초 '국민의 지지가 있는데도 후보가 안되면 불행해진다'고 말한 것도 당시 당내에 퍼지고 있던 이인제 비토론에 대한 정면 반격이었다.

그러나 경고의 약발은 먹히지 않고, 사태는 더욱 나쁜 쪽으로 풀렸다. 든든한 후원자이던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정동영 최고위원의 저격을 받고 주저앉은 것이다. 이후 등장한 김중권 대표 체제는 그의 당내 입지를 더욱 좁혀놓았다. 더욱이 최근에는 김대표가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김대표 독주를 제어할 연대 세력이 마땅한 것도 아니다. 당내 최대 주주로 떠오른 한화갑 최고위원과는 여전히 소원하다.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이 대중적 지지를 업고 경쟁자 반열에 올라선 것도 부담이다.


"당내 정치에 휘둘리면 상처만 입는다"


이런 당내 상황이 '불안한 1위' 이위원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도록 만든 셈이다. 이에 대해 한 측근은 "결국은 국민의 지지를 더욱 높이는 수밖에 없다"라고 주변의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측근인 원유철 의원은 "흠집 나지 않기 위해서도 당분간 외부 활동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이위원의 행보에 당내 정치에 휘둘리면 오히려 상처만 입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당 밖 활동 가운데서도 이위원이 최근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각종 공부 모임이다. 민생 투어가 대중 지지율을 높이면서, 대권만이 아닌 민생에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공부 모임은 준비된 지도자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위원은 이미 1999년부터 김광두 교수(서강대·경제학), 서승환 교수(연세대·경제학) 등 경제학자 20여명과 함께 2주에 한 번씩 경제 공부를 해왔다. 이위원은 최근 자신의 경제관을 'IJ노믹스'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IJ노믹스는 현정부의 경제관과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최근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인용해 정부의 구조 조정 노력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동안 경제 공부에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위원은 최근 통일·외교 분야와 환경 분야의 과외 모임도 새로 시작했다. 특히 통일·외교 분야 공부 모임은 지난해부터 부정기적으로 모이다가 최근 지식국가포럼이라는 명칭의 월 1회 정기 모임으로 틀을 바꾸었다. 최평길 교수(연세대·정외과)와 유찬열 교수(덕성여대·정치학) 등 20여명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 환경공부모임에도 관련 분야 교수 1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인제 위원은 기존 개혁주의자의 모습에서 합리적인 온건 보수주의자로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도 준비 중이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섞여있는 여권내 '반창(反昌) 연합'의 후보가 되려면 보수주의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위원은 연초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했다. 하나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를 참배하고, YS에게 큰 절을 했던 이른바 '아버지 순례'이고, 또 하나는 JP를 겨냥한 "태양은 다시 뜬다"라는 발언이다.

이위원의 측근인 박범진 전 의원은 이에 대해 '역사의 창조적 계승 작업 차원'이라고 말했다.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손잡고 두 차례나 정권을 창출한 지금 민주화니 개혁이니 얘기하는 것은 과거 지향적일 뿐이고 지금은 통합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JP·YS와 '연합'도 쉽지 않아


그러나 이위원의 변신 작업이 잘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JP·YS·김윤환 민국당 대표 등이 이위원을 '연합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다. 관계 개선 노력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반응은 차갑다. 지난 1월 말 미국 방문 때 JP와 만난 사실도, 한화갑 최고위원과 단독 미팅을 했다는 사실도 모두 이위원 쪽이 언론에 흘렸다. 이런 언론 플레이에 대해 상대방은 모두 마뜩찮아 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만큼 이위원 진영의 초조감만 드러내고 만 셈이다.

여론조사 1위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이위원에 대한 영남 지지율은 여전히 10%대에 머무르고 있으며, 영남의 이위원 비토 분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없다. 최근 여권 핵심부가 은밀하게 영남권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위원 지지율이 예상보다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소식도 들린다. 1월31일∼2월1일 실시한 <시사저널> 조사에서도 이위원에 대한 영남지역 단순 지지율은 대구·경북 12.1%, 부산·경남 11.8%였고, 이회창 총재와 맞대결을 벌일 때도 24∼25% 선에 머물렀다. 당내 경쟁자인 노무현 장관은 이총재와 맞대결해 영남에서 25∼29% 지지율을 얻었다. 이런 점 때문에 민주당 안에서는 영남후보론이 점점 세를 얻고 있다.

이위원 지지 계층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점도 약점으로 지적된다. 이위원은 남성·블루칼라·저학력층·20대에서 강한 지지를 받는 반면, 여성·고학력층·40대 이상에서는 지지율이 떨어진다. 이런 경향성은 그가 1997년 대선 무렵 등장한 박정희 신드롬의 수혜자였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그는 점퍼 차림으로 거리를 누볐고, 국민신당 당사에는 새마을 깃발을 본뜬 '애국심' 깃발을 세워 놓았다. 한 여론조사 분석가는 "이런 틈새 전략은 그의 대중적 인기를 수직 상승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중산층이나 고학력층의 이인제 비토 움직임을 부른 측면도 있다"라고 분석했다.

최근 민심 투어의 첫 번째 대상으로 충남 당진을 택한 것도 '과거 박정희 신드롬을 일으킬 때의 이인제 후보를 닮았다'는 것이 이 여론조사 전문가의 진단이다. 이 전문가는 "이위원은 자신을 지지하는 계층에는 쉽게 다가가지만 비토 그룹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라면서, 이는 지지율 확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 총선 때 영남 지역 방문을 꺼려하기도 했다.

이렇듯 지역과 계층에 따라 지지율 편차가 심하다는 점은 이위원의 최대 약점이기도 하다. 부동의 1위인데도 '이인제로는 안된다'는 한계론이 민주당 안에서 수그러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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