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브레이크' 걸린 재벌 개혁 '드라이브'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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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야당·언론 '연합 공세' 받고 주춤…
당정 정책 추진력 약화, '규제 완화' 분위기



재벌 개혁은 어디로 가는가? 그동안 여야와 재계가 뒤엉켜 논란을 벌였던 재벌 논쟁은 지난 5월16일 정·재계 간담회와 5월 19, 20일 열린 여·야·정 경제 토론회를 거치면서 겉으로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구조 개혁의 큰 틀은 유지하되 기업의 창의성을 옭아매는 규제는 구체적인 논의를 거쳐 완화해 간다는 것이 합의 내용이다. 그러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정치권 내에도 재벌 정책에 정치 논리가 개입하기 시작해 재벌 개혁이 후퇴하고 말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5월 초 재계가 규제 완화를 주장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 배경에는 정치 논리가 어른거렸다. 지난 5월2일 자유기업원 민병균 원장은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의 e메일에서 '정부와 민노총·전교조·참여연대 등이 합세하여 한국 사회를 국정 파탄의 궁지로 몰아 가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궐기를 호소했다. 이어 5월7일에는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과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이 출자 총액 제한과 부채비율 200% 제한 등 대기업에 대한 획일적 규제를 완화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재계의 '조직적 공세'는 경기 침체라는 경제 상황뿐 아니라 최근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IMF 이후 재벌 개혁을 밀어붙여 온 DJ 정권이 틈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도는 갈수록 추락해 조기 레임 덕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고, 여권 내부는 개혁 마무리냐 개혁 지속이냐를 놓고 혼선을 보여 왔다.


더구나 차기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정부·여당은 갈수록 재계의 지지가 아쉬운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경제 회생을 난국을 돌파할 열쇠로 보는 여권은 대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확대해 경기 활성화에 협조해 주기를 갈구하고 있다. 그동안 IMF 원죄론 때문에 숨을 죽여온 재벌 기업이 목소리를 높일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재벌 논쟁에 언론과 한나라당이 가세하면서 재계의 목소리는 더욱 힘을 받기 시작했다. 언론사 세무 조사와 신문 고시 부활을 계기로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 강도를 높여 온 주요 신문들은 '재계도 할 말은 한다'는 논조로 재계의 공세를 뒷받침했다. 한나라당 역시 정부의 재벌 개혁은 재벌 해체 정책이라고 비판하며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재계와 야당과 메이저 신문의 연합 공세로 재벌 논쟁을 둘러싼 힘의 지형은 변하기 시작했다.




재벌 정책 비교






































정부·여당 한나라당
재벌 정책 기조 문어발 확장 방지 위해 개혁 원칙 고수하되 부분 보완 지배 구조의 투명성 강화하되 기업 투자 활동은 자율화
경제활성화 대책 재벌 개혁과 중소기업 및 벤처 투자 활성화 대기업 규제 완화해 투자 촉진
출자 총액 제한 예외 규정 확대 출자총액 한도 상향 조정
부채 비율 200% 일부 분야 탄력적 운용 탄력적 운용·단계적 폐지
30대 기업집단 지정 현행 유지 4∼5개로 축소
집중투표제 시기 상조 시기 상조
집단소송제 단계 도입 도입
현대 처리 경제 파급 고려해 회생 지원 출자 전환 등 지원 규모 최소화


지난 5월16일 정·재계 간담회에서는 정부와 재계가 공동으로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 재계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로 합의했다. 세부 내용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재계의 요구가 더 많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미 재벌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불거진 상황에서 정치권의 분위기가 규제 완화 쪽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 내 "규제 완화" "후퇴 불가" 두 목소리




정부·여당의 경우, 재벌 개혁의 원칙은 고수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정책 추진력의 강도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진 념 부총리가 이미 5월 초 규제 완화 가능성을 내비쳤고, 관료 출신인 강운태 민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도 상황 변화를 들어 규제 완화 논리를 앞장서 펼쳤다.


민주당의 정체성 혼란도 여권의 추진력을 약화시킨 요인이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손해 볼 곳에 투자할 기업은 없다면서 "투자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늘려야 할 시기에 정부·여당이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오해가 있다"라며 규제 완화를 강조했다.


반면 개혁 성향인 김근태 최고위원은 정·재계 간담회에서 태스크 포스를 구성하기로 한 것에 대해 "재벌 정책은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민과 소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라고 토를 달았다. 재벌 개혁이 후퇴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앞으로 여권 차기 주자들의 자기 목소리 내기, 개혁 정체에 대한 소장 개혁파 의원들의 반발 등으로 여권 내부의 구심력은 더욱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은 김만제 신임 정책위의장이 등장하면서 보수 노선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김의장은 재벌 개혁의 핵심 과제가 소유·지배 구조에서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라면서 "출자 총액 제한·부채비율 제한 등 기업의 투자 활동을 위축시키는 규제는 대폭 정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결합재무제표 작성, 소액주주의 집단소송제, 상속세 등을 엄격하게 적용해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되 투자 활동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기업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의장은 최근 정부가 내놓은 출자 제한 완화 방침에 대해서도 "크게 미흡한 수준이며 출자 제한 한도를 25%에서 35%로 늘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유승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은 DJ 정권의 재벌 개혁이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재벌 개혁을 주장하면서 현대나 대우 처리 과정에서는 정치적으로 배려했다는 것이다. 김만제 의장 역시 최근 현대건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특혜라면서, 채권단의 출자 전환은 결국 국민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원 규모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이 안고 있는 부담도 있다. 이부영 부총재는 한나라당의 재벌 정책이 마치 재벌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우려했다. 김원웅 의원은 재벌 개혁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면서 "당지도부가 집단소송제나 상속 문제 등 재벌 기업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동안 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지도부는 내부의 이견과 재벌을 옹호한다는 여론의 눈총을 우려하면서도 정부·여당의 재벌 정책에 대한 비판을 고수할 태세다. 지난 5월19, 20일 여·야·정 경제토론회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앞으로 경제 상황이 불투명한데 경제 실정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하기도 했다.


재벌 문제에 정치 논리가 개입하기 시작한 이상 DJ 정권의 재벌 개혁은 그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지지도가 바닥인 DJ 정권이 재계·언론·야당의 연합 공세를 버텨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문제는 재벌 문제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자칫 경제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1997년에 겪었듯이 경제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큰 상황에서 정부의 통제력 약화는 경제 혼란과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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