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론이 대수냐, 나부터 살아야지"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2001.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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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사·광주시장 '시·도 통합,

도청 이전 중단' 합의…"지방선거용" 의혹


청와대와 민주당이 꾹꾹 눌러 닫아두고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호남 지역 두 단체장이 다시 열어젖뜨려 파란이 일고 있다.


허경만 전남도지사와 고재유 광주시장은 지난 7월18일 광주·전남 통합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오는 10월까지 광주시가 통합 절차를 밟으면 현재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 조성되고 있는 전남도청 이전 사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고재유 광주시장은 광주시의회에 '시·도 통합 반대 결의안'을 재론해 달라고 촉구하고, 주민 의견 조사를 실시하는 등 통합 논의를 적극 추진할 예정이다.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통합에 합의한 명분은 갈등 해소와 정권 재창출이다. 허경만 지사는 내년에 정권을 재창출하기가 쉽지 않은 시점에서 도청 이전과 시·도 통합 논란으로 갈등이 심해져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2천1백51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도청 신축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시·도 통합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갈등과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주민의 반응은 극심하게 엇갈리고 있다. '전남도청 이전 반대 및 광주·전남 통합 추진위원회'(통추위:수석 대표 오병문·이양우)는 성명을 통해 적극적인 환영 의사를 밝혔다. '광주자치연대'와 '참여자치 21' 등 사회단체들도 주민 의견 조사와 시·도 통합 추진 기구 구성을 요구하는 등 논의 재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자치단체장들이 이를 정치에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민주당 "정략적 결정" 거세게 비난


반면 목포시의회를 비롯해 목포지역범시민단체연합 등 서남권 지역 사회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국책 사업으로 이미 결정해 진행 중인 도청 이전을 중단한다는 것은 정치적 망발이라고까지 규탄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도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스럽다. 민주당 전남도지부는 지난 7월24일 워크숍을 통해 국책 사업인 도청 이전을 예정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진화에 나섰다. 반면 광주시지부는 지난 2월 정동채 지부장이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도청 이전 잠정 중단 지지 의사를 밝힌 데다, 강운태 의원은 시·도 통합을 거론하고 있어 도청 이전 중단과 시·도 통합 쪽에 더 무게를 두는 양상이다.




그 동안 나주·담양·화순 지역 주민과 순천·여수 등 동부권 주민 사이에는 1999년 도의회의 도청 이전 결정이 주민과 충분한 합의 없이 무리하게 이루어졌다는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반면 전남도청이 위치한 광주 금남로·충장로 지역 주민은 광주시가 도청 이전에 따른 도심 공동화 대책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끊임없이 도청 잔류와 시·도 통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기류를 타고 통추위가 지난해 말부터 '도청 이전 반대와 시·도 통합'을 전면에 내걸고 논쟁에 불을 지폈다.


퉁추위는 지난 6월에는 버스 40여 대를 타고 서울로 가 민주당 김중권 대표를 면담하고 청와대 상경 투쟁과 도로 점거 농성까지 감행하며 대통령과 민주당을 압박했지만 청와대와 민주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도 손대기 쉽지 않은 '뜨거운 감자'를 서로 핑퐁 게임 하듯 떠넘기기만 하던 시장·도지사가 통합 논의 재개에 전격 합의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내년 지방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기대하는 민주당은 도청 이전 유보나 시·도 통합 논란이 지역 분열을 가중시켜 텃밭에서부터 민심 이반과 대통령의 레임 덕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살얼음판을 건너듯 조심 해왔다.


대신 민주당은 목포 등 서남권에는 전남도청과 신도시 조성, 여수 등 동부권에는 2010 해양박람회 후보지 선정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 뒤 1999년 전남도의회의 '도청 이전 조례안'을 천신만고 끝에 가결시켜 도청 이전과 시·도 통합이라는 골칫거리를 겨우 처리했던 것이다.


때문에 민주당 핵심부로서는 시장·도지사의 돌출적인 이번 합의를 내년 지방 선거를 겨냥한 정략적 결정이라고 몰아붙이며 거세게 비난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지난 7월24일 광주에서 열린 민주당 전남도지부 워크숍에서 김홍일 의원(목포)이 기조 발표를 자청해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앞세워 호남의 백년대계를 그르쳐서는 안된다"라며 허경만 전남도지사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민주당 내부에서는 허지사가 내년 3선 고지를 넘기 위해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였던 시·도 통합 카드를 다시 빼들었다가 여의치 않으면 당을 떠나 독자 노선을 걸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 허경만·고재유 제어 못해 '난감'




문제는 민주당 핵심부의 이런 기류를 무시하고 있는 두 단체장을 민주당이 제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장·도지사가 1997년 지방 선거 때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자력으로 당선된 데다, 특히 허지사의 경우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정치인인 까닭에 민주당의 브레이크가 도무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도지사가 전격 합의해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도청 이전 중단과 시·도 통합은 만만치 않은 난관을 앞에 두고 있다. 전남도청 이전은 김영삼 정부 때 결정된 사업으로 현재까지 국고 2백67억원을 투입해 토지 보상을 마무리했고, 오는 10월 신청사를 건축할 업체 선정에 들어간다. 사업이 전면 중단될 경우 중앙 정치권에서조차 엄청난 국고 손실이라는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광주사회조사연구소(소장 김순흥)의 여론조사 결과 시·도 통합에 찬성하는 광주시민이 54.3%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시·도 통합 바람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기류를 의식한 듯 고재유 광주시장은 중앙 정치권 등 민주당 핵심부의 반대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는 질문에 "광주·전남 통합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의 주체는 시·도민이다. 시장·도지사는 물론 시·도 의회, 중앙 정부, 국회의원 등 중앙 정치권도 다수 주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광주시는 시·도 통합에 따른 득실을 충분히 홍보한 뒤 주민 의견을 조사할 계획인데, 만약 현재의 시·도 통합 논란이 지방 선거 때까지 이어질 경우 민주당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정도로 민심 이반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내년 지방 선거에서는 무소속이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데다 한나라당 광주시지부(지부장 이환의)가 이미 '도청 이전 반대와 시·도 통합 찬성' 성명을 내고 당론 확정만 유보한 채 전남 지역 민심 분열에 따른 반대 급부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봉합하고 주민의 불만을 달랠 선물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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