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경제단장은 '밤의 대통령'?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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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윤씨, 수뢰 혐의 외에 이권 개입 의혹…
야당 "경제 비리 사건마다 조직적 개입"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 같은 경제 비리의 배후에 국정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10월5일 국정원 김형윤 전 경제단장이 전격 구속된 것이 관심을 끄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김씨는 지난해 7월 정현준 게이트의 주역인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에게서 금융감독원의 금고 조사를 무마한다는 조건으로 5천만원을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는 또 광주상고 후배인 G&G 구조조정(주)그룹 이용호 회장이 추진한 전남 진도 앞바다 보물선 발굴 작업과 연관이 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1999년 10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국정원 광주지부 목포출장소는 진도 앞바다에 금괴 운반선이 존재하는지 직접 조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용호씨는 올해 초 이 보물선 정보를 공시해 2천원에 불과하던 가죽가공업체 삼애인더스 주가를 1만7천5백원까지 띄웠다.


김형윤씨, 고속 승진한 '호남 대표'


국정원은 보물선 답사가 지난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대공 담당 엄익준 차장의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보물선 탐사가 대간첩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어서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한나라당은 국정원 보물선 사업은 사업 성격상 국내 정보 파트가 주도했을 것이고, 당연히 경제단을 지휘한 김씨가 개입했을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김씨는 이용호 회장과 지난 6월까지 서울 강남의 룸살롱을 드나들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이 검찰 수사 결과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가 국정원 경제단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이씨에게 각종 사업 정보를 알려주고 금감원이나 금융기관 등에 압력을 넣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국정원 대공정책실 산하 경제단은 경제 전반의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는 일을 맡은 곳으로, 국정원 직원들이 선망하는 부서이다. 국정원 경제단은 막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재계는 물론 경제 부처까지 주물러 '경제계의 밤의 대통령'으로 불린다. 실제로 김씨는 이경자 부회장에게서 로비를 부탁받자 금감원의 금고 조사를 무마하고 사례비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국정원은 현정권 들어서 경제 정보 수집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고, '꽃보직'인 경제단에 호남 인맥을 대거 중용했다. 김 전 단장도 현정권에서 고속 승진한 호남 인맥의 대표 주자이다. 그는 1992년부터 국정원 광주지부 정보처장으로 있다가 1998년 경제과장으로 발탁되어 서울에 올라왔는데, 지난해 6월 정기 인사 때 경제단장(2급)이 되었다.


목포중·광주상고 출신인 김씨가 현집권당의 본거지인 광주에서 YS 시절 국정원 활동을 하며 사귀어 놓은 정치권 인맥이 진급에 힘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주변에서는 경제 분야 경험이 전혀 없는 김형윤씨가 정권의 요직인 경제과장으로 발탁된 배경에는 대통령 최측근인 한 여권 인사의 입김이 있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 여권 인사는 경제통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김씨는 5천만원을 수뢰한 것이 벌써 오래 전에 국정원 내부에 알려졌는데도 아무 징계도 받지 않았다가 신 건 원장이 취임한 지난 6월에야 정보학교 교수로 물러났다. 신원장은 최근 정보위 국감에 출석해 김씨 사건을 신문 보도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신원장은 검찰이 국정원 고위 간부를 출국 금지해 놓고 국정원에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김형윤 전 단장 수뢰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9월18일자 〈동아일보〉 보도 이후이다. 이 신문은 지난해 정현준 사건 때 검찰이 김씨가 수뢰한 사실을 알고도 사건을 덮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검찰 수뇌부는 이 사건을 쉬쉬했을 뿐 아니라,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수사하려는 서울지검 특수2부의 담당 검사를 인사 조처하려고 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당시 검찰은 이 사건을 수사하려다 국가기관끼리 마찰을 빚는 것으로 비칠까 봐 그만두었다고 해명했다.


야권은 신용금고에서 수천억원대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진승현 사건에도 국정원 경제단이 개입했다고 본다. 진승현 사건과 관련한 호남 출신 경제과장이 신원장 취임 후 전근 발령되는 인사 조처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씨는 자신의 불법 행위에 대한 금감원 조사가 마무리되던 지난해 9월부터 구속되던 12월 초까지 잠적해 정계에 전방위 구명 로비를 펼쳤다. 진씨는 대리인을 통해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과 정 아무개 전 검찰총장에게 변론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국정원 직원들이 이 사건의 주임 검사인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를 찾아다닌 것이다. 담당 검사와 같은 대학 출신인 국정원 직원 4∼5명이 검찰을 상대로 진승현씨 사건을 조사하고 다녔다. 당시 진씨 사건을 수사하던 한 검사는 "국정원 감찰실에서 일하는 주임 검사의 대학 동기들이 찾아왔었다"라고 밝혔다. 경제단도 아닌 다른 부서 인맥까지 동원할 정도로 국정원이 바쁘게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김은성 차장이 신승남 당시 대검 차장에게 진씨 사건과 관련해 몇 차례 전화했던 것이 드러났다. 일부 검사가 국정원의 이런 활동에 불쾌감을 표시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국정원 내부, 김씨 구속되자 "올 것이 왔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김씨의 뇌물 수뢰가 단순한 개인 비리가 아니라고 본다. 한나라당은 김씨의 배후와 그가 사법 처리가 되지 않았던 이유도 특별검사제를 도입해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은 "국정원이 금감원을 끼고 일련의 경제 비리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단서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김형윤씨를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특수부는 김씨가 이형자씨로부터 5천만원을 받았는지 여부만을 수사하고 있다. 검찰개혁론이 힘을 얻을 정도로 여론이 흉흉한 상황에서 수사를 확대했다가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역으로 또 봐주기 수사를 한다는 구설에 오를까 봐 몸을 사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검찰 관계자들마저 김형윤 전 단장의 역할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검찰이 어물쩡 덮어버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검찰에 이어 국정원에 또다시 발등을 찍힌 민주당은 야당의 공격에 대비해 국정원에 사건 관련 정보를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내부 단속이 전혀 안 되어 여당을 궁지로 몰고 있는 정보기관이 무슨 소용이냐며 '국정원 무용론'마저 제기하고 있다.


국정원 내부는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대규모 감원과 호남 편중 인사로 무기력해진 조직을 이번 기회에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정원 안팎에서는 '정보부 창립 이래 간부가 돈을 받고 검찰에 구속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무력감을 느낀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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