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뻣뻣한 갈대’의 흔들흔들 대북 정책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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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애매모호 북한관’, 당 안팎 역풍에 시달려
전략적 상호주의, 혹은 선택적 포용 정책.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대북 정책을 상징하는 단어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된 적은 없다. 한나라당 내에서조차 그 함의를 정확히 설명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현정권의 햇볕정책에 비해 다소 보수적일 것이라는 인상 비평 정도만이 공유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의 보수주의가, 같은 당 소속 김용갑 의원 류의 보수주의와 동질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얼마 전 언론 인터뷰에서 대북 정책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지적을 받자 이렇게 말했다. “이 정부처럼 사후 대비책 없이 무조건 포용하자는 입장은 아니라는 점에서 보수적이라면 옳다.”


그의 보수는 이념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인 것인 듯 보인다. 포용 정책은 북한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며, 대북 지원도 국민 설득을 우선해야 한다는 식이다. 물론 여전히 추상적이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애매한 대북관’이 최근 위기에 부딪힌 느낌이다. ‘김정일 답방 반대’ ‘한반도 전쟁 가능성 언급’ ‘햇볕정책 비판’ 등 이총재의 방미 중 발언이 잇달아 도마에 오르면서부터다. 이총재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을 지지(승인)했다는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진위 논쟁까지 불렀다(30쪽 딸린 기사 참조).


도대체 이총재가 지향하는 대북관·대북 정책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의 대북관이 애매한 이유 중 하나는, 대북 정책이 아직 그에게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번 미국 방문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미국 정책에 적극 순응하려 했다” 분석도


지난해 말부터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고, 대북 강경책이 지배적이었다. 애초부터 이총재가 대등한 처지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뚜렷한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미국의 입김에 휘둘렸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우려는 출발 전부터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방미를 강행했다. “이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미국 대신 중국을 첫 외유지로 택한 것 때문에 손해봤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미국 방문에 매우 큰 의미 부여를 했다.” 한 측근 인사의 말이다.





이와 함께, 이총재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국의 정책에 순응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부터 이총재의 대미 접근은 무척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지난해 10월 김원웅 의원이 미국의 중동 정책을 비판하자 이총재는 이례적으로 정면에서 반박했다. 9·11 테러 당일에는 청와대보다 앞서 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고, 자정을 넘긴 심야에 총재단 회의를 열기도 했다. 주한 미군 주둔군지위협정(SOFA)이나 노근리·매향리 문제에 소극적인 것도 미국을 의식한 탓이라는 지적이다.


이총재는 그동안 헤리티지 재단을 비롯한 미국 공화당쪽 인사들과 끊임없이 만났다. 이총재의 미국쪽 인맥 형성 작업은 주로 서울국제포럼의 한승주 고려대 교수·백진현 서울대 교수 등이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총재로 하여금 전향적인 대북·통일 정책을 견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은 또 있다. 바로 이총재 자신과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의 괴리 현상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전반적인 성향은 이총재보다 훨씬 보수적이다. 특히 김용갑 의원 등 ‘목소리 큰’ 의원들의 강경 발언이 오버랩되면서 이총재는 본의와 달리 강경주의자가 되는 일이 잦다. 지난해 10월 대북 쌀 지원 문제가 등장했을 때 일이다. 이총재는 당시 인도적 차원에서 6천억원 규모의 쌀을 북한에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총재의 발언은 당내 반발로 며칠 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한나라당의 당론은 오히려 그 이후 쌀 지원 절대 불가로 바뀌었다. 이총재의 측근은 당시 일을 회상하면서 “총재는 개인적으로 쌀 지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2월4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 이후 상황도 마찬가지. 이총재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대북 정책의 세 가지 방향을 정리해 제시했다.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해결에 협조해야 하고, 미국은 대북 대화에 나서야 하며, 국민 안전과 평화를 위한 초당적 협력을 약속할 수 있다’는 요지였다. 이총재는 이 날 대정부 비판도 상당히 자제했다. 줄곧 반대해온 금강산 관광마저 육로 개방과 특구 지정을 통해 지속 가능한 관광 상품으로 만들라고 촉구하기까지 했다.


총재 따로, 의원 따로…‘엇박자’ 대북 행보


그러나 연설 이후 한나라당이 보인 행보는 이총재의 뜻과 전혀 딴판이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한나라당 간사인 조웅규 의원은 이총재가 연설한 다음날인 5일, 정부가 남북협력기금 운용계획에 포함되지 않는 항목 중 10억원 이상을 사용할 경우 국회 사전동의를 받도록 하는 남북기금법 개정안을 자민련과 협의해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대변인실도 이후 10여 차례 논평을 냈으나, 대북 비난과 햇볕정책 비판이 주 내용이었다. 2월7일 국회 통외통위 회의장에서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금강산 사업은 경제사업과 평화사업의 양면성이 있다’는 정세현 통일부장관의 발언에 항의하며 집단 퇴장하기도 했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8일 당내 남북관계특별위원회와 국제위원회 연석회의에서도 미국에 대한 입장 표명은 쏙 빠졌고, 정부와 북한만 마냥 두들겨댔다.


이렇게 되자 한나라당 내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팽배했다. 한 당직자는 냉전적 사고방식은 국익과 당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애초 당 지도부는 이총재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수준에서 대북 문제를 정리하려 했으나, 보수 강경파 의원들의 기세에 밀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총재를 인터뷰한 <뉴스위크>는 기사 제목을 ‘서울의 뻣뻣한 갈대’라고 붙였다. 미국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당내 의원들에게도 휘둘리는 등 강·온 양쪽을 오가는 모습이 미국 언론에도 갈대처럼 비친 것이다.


<뉴스위크>가 지적한 대로, 이총재는 김정일 위원장의 ‘약속’들이 깨질수록 인기가 높아져서 이제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가 되어 있다. 그럴수록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어갈 책임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부영 한나라당 부총재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비판만 하지 말고, 이제 대안을 제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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