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경선=조직력 경선?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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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후보들, 선거인단 ‘집단 모집’ 전쟁…이인제·한화갑, 발군의 능력 보여
"누가 국민을 위하는 후보인지 잘 보고 선택하겠습니다.” 민주당 경선에서 제주 지역 국민선거인단 3백78명 중 1번으로 선정된 강경수씨(41·제주도 서귀포시). 관광버스 기사인 그는 3월1일에도 평상시처럼 운전대를 잡았다. 뽑힌 지 이틀째. 그의 생활에는 아직 변화가 없다.





지지를 호소해온 후보도 없다. 어느 후보쪽 운동원으로부터 지원서를 받아 응모했지만, 딱히 그를 찍겠다는 결심이 서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강씨의 이런 호젓함은 오래가지 않을 전망. 강씨를 ‘우리 편’으로 분류해 놓은 후보쪽 캠프는 이미 방어 대책을 다각도로 세워 놓았다. 안부 전화는 기본이고, 모집책을 통한 수시 점검까지 모든 방법을 동원할 방침이다.



반면 다른 캠프에서는 강씨 ‘포섭 작전’을 계획 중이다. 우선 선거인단에 뽑힌 사람의 기본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 이 캠프는 이를 위해 신용정보회사의 도움을 받을 계획까지 세웠다. “강씨는 이미 특별 관리를 받고 있어 접근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강씨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우회적인 설득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적진 공략을 모색하는 한 캠프 참모의 말이다. 2월28일 제주 선거인단이 발표된 다음부터, 선거인단을 지키거나 빼오기 위한 후보들의 ‘007 작전’이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선거 당일 얼마나 지지를 받느냐보다, 지지 대의원의 참여를 누가 많이 끌어내느냐가 승부를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국민경선제의 특징. 민주당 경선도 국민선거인단 모집이 ‘전쟁’ 수준이다.

메이저 후보 3인, 선거인단 신청자 싹쓸이했나


부산에서 양말 도매상을 하는 이 아무개씨(38)는 이 ‘전쟁’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 선거인단 지원서를 혼자서 3천여 장이나 받아냈기 때문.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 회원인 그는 회원들 사이에서 ‘미키루크’라는 아이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영업 수완과 노사모 활동을 통해 익힌 정치 식견이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자평이다. 4월20일 부산 대회 때까지 5천명을 모으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씨가 노무현 캠프의 스타라면, 안평수씨(54·개인사업)는 이인제 캠프의 영웅이다. 울산에서 선거인단 지원서를 홀로 2천8백장 받아낸 것. 대학 친구인 이고문을 돕기 위해 자원 봉사 중인 안씨는 국민통합추진회의 멤버로 5~6년 전까지 정치인이기도 했다. “바닥을 둘러보니 이인제 학습 효과니 하는 거부감은 거의 없었다. 영남 공략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전직 정치인 안씨의 소감이다.



대규모 선거인단 모집은 이인제·한화갑·노무현 등 이른바 메이저 후보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인제·한화갑 고문은 주로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탄탄한 공조직을 활용하고 있다. 한고문은 불교계의 성원이, 이고문은 이인제 대세론이 힘을 돋우는 원군이다. 반면 노무현 고문은 노사모 등 자원봉사자 그룹이 부실한 공조직을 대신하고 있다.



이들 세 후보는 제주에서 1차전을 치렀다. 그 결과 이인제·한화갑 후보측이 1만8천~1만9천 명을, 노고문측은 1만3천명을 모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모은 숫자만 합쳐도 5만여 명. 전체 인원 6만5천명 중 77%가 이들을 통해 모집된 셈이다. 이렇게 과열 경쟁이 되다 보니 중복자가 생기게 마련. 1만7천명이 중복자나 자격 미달자로 탈락했다. 결국 4만8천명이 응모해서 3백78명이 뽑혔고, 경쟁률은 130 대 1에 이르렀다.



캠프 내부의 경쟁도 치열하다. 한 캠프 소속 참모의 말. “과거에는 몇만 표 가지고 있다는 바람잡이들이 통했으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누가 몇장 모았는지 실적이 즉각 공개된다. 충성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고,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지난 2월28일 의원회관에 있는 한 후보의 사무실. 보좌관이 노란색 국회 봉투에 응모 지원서 20~30장씩을 넣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서 다 이렇게 한다. 4월 말이 되면 참모들의 성적이 나올 것이다.” 그 보좌관의 말이다.



이러다 보니 국민선거인단 경쟁률은 곳곳에서 수십 대 1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국민선거인단 모집을 시작하던 지난 2월 초 지원자가 만명에도 미치지 못하자 우려하던 민주당 지도부의 표정도 이제 바뀌었다. 반면 이른바 열세 후보들은 유력 후보들이 돈으로 조직적인 동원을 일삼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정동영 후보는 2월26일 “당첨되면 해외 여행을 보내준다며 동원하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라고 주장했다. 김근태 후보도 같은 날 성명을 내고 “일부 후보가 제주 선거인단 모집에 엄청난 돈을 들여 대규모 조직 동원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보험설계사를 동원해 선거인단 모집에 나서는 후보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공조직을 굴리며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한 지역당 수억원씩 모두 수십억원 이상 들 것이라는 말도 나돌고 있다.



정동영·김근태, 바람·이미지 전략 ‘고전’



그러나 열세 후보들에게 이런 소문은 그림의 떡.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돈도 조직도 아닌, 바람과 이미지다. 정동영 고문은 설 연휴를 포함해 2월 중 20일 이상을 제주도에서 살았다. 다른 지역의 지구당 개편대회 참석도 대부분 포기할 정도였다. “제주에 살면서 서울을 다녀온다.” 정고문의 표현이다. 그 덕분에 2월중 한 여론조사에서는 제주도에서 2위를 차지했다. ‘제주발 태풍’이 몰아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내부 분석이다. 그러나 바람이 통할지는 미지수다.


서울 여의도 미주빌딩 2층에 있는 한반도재단. 김근태 후보의 경선 사무실이다. 참모 ㅈ씨가 ‘반부패 클린 후보 김근태’라는 글자가 쓰인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홍보 담당자인 그는 김근태만한 재료도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탄’ 부족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국민 경선이라지만 결국은 조직 선거로 치러지는 현실에서 ‘클린 후보’라는 이미지는 너무 나약한 것.



김근태·정동영 후보가 수 차례 돈 선거를 경고하고 나선 까닭도 이런 자괴감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유력 후보들의 조직 선거를 초반에 제어하지 못할 경우 승산이 없다는 절박감도 강하다. 김근태 후보가 3월1일 지난 8·30 최고위원 경선 때 사용한 경선 비용을 공개하는 극약 처방을 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돈 선거를 우려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후보의 측근은 국민선거인단을 상대로 돈을 뿌리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일축했다. 양심선언이라도 나오면 끝장인데 무리수를 둘 후보는 없다는 것. 다른 후보의 측근도 일부 후보들이 흠집 내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역부족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된다고 공박했다. 2000년 8월 치른 최고위원 경선에 비해 후보들의 돈 사정이 넉넉지 않고, 따라서 돈을 적게 쓴다는 주장도 있다.



민주당 중앙당 부위원장인 김 아무개씨(48)는 이른바 ‘야당 30년 동지’의 말석쯤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연초에 이인제 캠프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다. 동료 부위원장 60명 정도가 같은 길을 택했다. 그러나 김씨는 최근 회의에 빠져 있다. 국민신당 출신들이 요직을 다 차지해서 마치 ‘손님’인 양 취급되는 데다, 대세론을 타는 후보답지 않게 캠프에 돈이 너무 말라 있기 때문. “사조직은 경비를 자체 조달하고 있으며, 캠프에서도 제주나 영남 등 몇몇 지역을 빼면 자금 지원을 거의 못하고 있다.



1위 후보가 조직에 기름칠할 돈도 없다는 것은 분명 민주당의 위기다.” 같이 온 60명 중 상당수가 빠져나갔거나 동요하고 있다고 김씨는 주장한다.
한화갑 고문 쪽에 줄을 선 부위원장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 호남 출신 부위원장은 지방 출장을 가는데 교통비만 달랑 받았다면서, 지난 최고위원 경선 때에 비해 자금 사정이 안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튼 돈·조직 선거 논쟁을 뒤로 한 채 본격적인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고 있다. 우선 목표는 3월9일 치러지는 제주도 경선. ‘한국의 뉴햄프셔’라는 상징성이 큰 만큼 향후 경선 방향을 예고하는 풍향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제주 국민선거인단의 뚜껑이 열린 후 대부분의 후보들은 1등을 자신하고 있다. 실제 치열한 동원에도 불구하고 부동표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민 경선 또한 결국 조직 대결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바람이 통할 것인가. 최후의 승자는 뚜껑을 열어 보아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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