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어 돈 안쓰면 돈 후보?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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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돈 선거 종식' 피곤한 소신 행보...의원 등 돌리고 조직도 삐걱



6·13 지방 선거 때의 일이다. 민주당 수원시장 선거 캠프에 노무현 후보가 격려차 방문했다. 마침 시장 후보가 자리를 비운 터라 노후보는 선거운동원들과 인사만 나눈 후 꾸러미 하나를 남겨두고 갔다. 캠프 사람들은 이 꾸러미가 선거지원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 후보가 선거 캠프를 방문하면 격려금을 놓고 가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시장 후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자기를 푼 이들은 그 안에 든 것이 시루떡이라는 것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떡값 대신 떡을 놓고 간’ 노후보의 일화는 그의 돈 씀씀이가 역대 대통령 후보와는 180°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대선 후보가 움직이는 대로 돈이 따라 움직였다. 후보가 지역구를 순방하면 격려금이 뒤따랐고, 후보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은 의원들은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노후보는 후보가 된 후 정치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건넨 적이 없다. 후보 직을 걸고 치른 6·13 지방 선거와 8·8 재·보선 때조차 하남과 부산에 각각 5백만원, 천만원씩 보낸 것이 전부였다.


비노파 사무총장, 곳간 여는 데 인색


노후보가 돈에 인색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돈이 없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돈 안 쓰는 선거를 하겠다는 소신 때문이다. 실제로 노후보 진영은 돈 가뭄이 심각하다. 노후보 비서들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 활동비로 쓴다. 가장 사람을 많이 만나는 유종필 공보특보에게 100만원 정도의 활동비가 지급되는 수준이다. 노후보 본인도 씀씀이를 최소화하고 있다.


당과 선대위원회가 이원화한 것도 노후보의 돈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대목이다. 곳간 열쇠를 사무총장이 쥐고 있기 때문에 당으로 들어오는 국고보조금이나 후원금을 후보 재량으로 쓸 수 없는 것이다. 현재로는 선대위원회 이상수 총무본부장이 지출을 결정해도, 유용태 사무총장이 동의하지 않으면 집행하지 못한다. 그런데 비노파로 분류되는 유총장은 “노후보가 데려온 비서들에게는 당이 월급을 줄 수 없다”라고 반발하는 등 비우호적이다. 이 때문에 노후보는 부산상고 동문이나 지인들이 보내주는 후원금으로 직계 비서들 월급과 자기 활동비를 겨우 충당하고 있다.


노후보는 대선 비용을 법정 한도 내에서 쓰겠다는 입장이다. 80억∼100억 원 정도로 예상되는 국고보조금과 곧 열 예정인 당 후원회, 그리고 ‘100만명 1만원씩 내기 운동’을 통해 대선 자금을 모으고, 그 한도 내에서 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노후보의 실험이 기존 선거에 익숙한 정치인들에게는 ‘무능력’으로 비친다는 점이다. 특히 반노·비노 의원들 사이에서는 ‘돈 만들 능력도 없고 돈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대통령 후보냐’라는 불만이 공공연하게 터져 나온다. 2백23개 지구당에서 법정 홍보물만 돌리려고 해도 지구당마다 몇 천만원씩 드는데,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때 친노파였던 김원길·박상규 의원이 적극적으로 ‘탈당 불사’를 외치게 된 것도 결국은 돈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대한전선 부사장 출신인 김의원이나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을 지낸 박의원은 민주당에서 몇 안되는 ‘자금책’이다. 재계에 발이 넓어 자금 동원력이 뛰어나고, 그 때문에 사무총장 같은 중책이 맡겨지곤 했다. “야당 때 DJ가 직접 나서도 후원금을 1억∼2억 모으기가 쉽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기업들 돌고 오면 수십억씩 모아왔다. 박의원이 초선인데도 부총재가 된 것은 그런 능력 때문이다”라는 것이 한 여권 인사의 얘기다.


노후보가 당초 김원길 의원에게 선대본부장을 제의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하지만 김의원은 딱 잘라 거절했다. “사무총장 때 보니 노후보는 돈 만들 생각이 없고, 측근들 가운데 자기 집 팔아 돈 대겠다는 사람도 없더라. 결국 나보고 돈을 만들어오라는 얘긴데, 미쳤나, 내가 대신 손에 피 묻히게.” 그 즈음 김의원이 주변 사람에게 털어놓았다는 속내다. 박의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박의원 소유 회사가 기아 협력업체여서 맨 먼저 정몽준 후보 쪽으로 기운 측면도 있지만, 기업인들 반응이 노후보에게 부정적인 것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방향을 바꿨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해석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정치인들이 돈 문제에 왜 그렇게 민감한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의원이나 원외 지구당위원장들은 대선을 다음 총선을 위한 전초전으로 생각한다. 위에서 지원금이 오면 그 돈으로 지구당 조직 재정비하고 당원들도 단속하는 것이다. 일부 위원장들은 대선을 ‘한몫’ 보는 기회로 삼기도 하지만, 대부분 지구당 빚을 갚거나 지구당 운영비로 비축하기도 한다. 평소 수도권 원외는 2백40만원, 영남·강원 등은 1백50만원 정도씩 중앙당에서 내려오는데 그 돈으로는 기본적인 경비도 빠듯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이 내려오기는커녕 자기 주머니까지 털라고 하니 반발하는 것이다.”


물론 후보 지지율이 높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각자 돈을 만들기도 하고, 정 안되면 자기 돈을 내서라도 선거운동에 적극 나선다. 그래서 한창 ‘노풍’이 불 때는 너도나도 노후보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다. 하지만 후보 지지율이 낮을 때는 돈 문제가 더욱 도드라진다.


“저 사람, 도대체 왜 왔다갔어?”


노후보도 이런 기류를 알고 있다. 그는 최근 의전팀이 의원들과 독대하는 일정을 빼곡하게 잡자 그러지 말라고 지시했다. “무조건 만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나도 예전에 상도동에서 부르면 내심 뭔가를 기대하고 갔는데, 명색이 대통령 후보가 만나자고 해놓고 빈손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것 아니냐.”


이 때문에 노후보는 한때 의원들을 밖에서 만나는 대신 의원회관을 찾아가 만나는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기대감을 낮추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두어 번 만에 포기했다. 노후보에게 우호적이었던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저 사람 도대체 왜 왔다 간 거야” 하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노후보는 돈에 관한 입장을 바꾸지 않을 전망이다. 9월30일 선대위 발족식에서 그는 다시 한번 돈 안 쓰는 선거를 강조했다. 그에 앞서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돈과 공천권으로 지도력을 세우던 3김식 정치는 이제 끝내야 한다. 노무현이가 과연 어디서 돈을 구해올 것이냐며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떠나시는 것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에 반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신당 창당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정몽준 후보측이 의원 1인당 20억원씩을 제시했다더라”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반노·비노 진영 인사들이 정후보 쪽으로 끌리는 것도 최소한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기대 심리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돈’ 때문에 생기는 원심력을 노후보가 어떻게 차단할지가 또 다른 관심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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