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마음’이 승패 가른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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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캠프들, 후보 호감도 높이기 주력…여성계는 정책 검증 별러



'수줍고 귀여운 남자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클린턴도 여성 표가 많았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하면 승산이 있다.’ 여성 유권자 과반 시대. 여성 표를 잡기 위해 각 캠프가 발벗고 나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여성 유권자는 1천7백78만여명. 남성보다 약 50만 표가 많다. 지난 6·13 지방 선거에서 여성 투표율은 근소하나마 남성을 앞질렀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여성들이 남편이나 아들의 표를 좇는 전통적인 ‘가족 투표’ 관행을 바꾸고 있다는 징후도 감지되고 있다. 여성정치세력연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족과 상의하되, 내 표는 내가 찍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50% 이상이었다.


과반수 여성이 나홀로 투표에 나선다면? 대선을 앞두고 여성계가 유례 없이 구체적인 검증 작업에 들어간 것도, 이번 대선이 여성의 역할 면에서 질적으로 다른 선거가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 여론조사에서는 정몽준이 가장 앞서


미국에서 여성 표 덕을 단단히 본 인물은 클린턴 대통령이다. ‘52년 만에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대통령’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은, 전적으로 여성들이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1996년 빌 클린턴은 보브 돌 후보를 10% 차로 따돌렸다. 클린턴 지지자 가운데 여성이 54%, 보브 돌은 37%에 그치면서 여성표 17% 격차가 곧바로 전체 득표율 10% 차이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성계의 후보 검증은 10월 말부터 본격화한다. 지난 10월23일 여성단체협의회(회장 은방희)가 이회창 후보와 간담회를 가진 데 이어 정몽준·노무현 간담회를 계획하고 있으며, 여성유권자연맹도 지난 10월30일 정몽준 후보 부인 김영명씨와의 간담회를 시발로 릴레이 간담회를 갖는다.


지난 10월25일 산하 100여 단체와 함께 2002대선여성연대를 발족한 여성단체연합은 더 조직적인 대응에 나선다. 핵심 과제를 잣대로 삼아 각 후보의 정책을 검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후보 진영에 압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체 명의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실정법을 비켜가기 위한 ‘쓰리 쿠션’ 전략이다. 동시에 현행 여론조사가 인상 비평에 머무르는 폐단을 넘어서자는 취지이기도 하다. 대선여성연대가 내걸고 있는 3대 핵심 과제는 호주제 폐지·고용 안정·보육의 공공성 확보이다.





현재 여성 표심의 지형은 어떨까. 정몽준 후보가 단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신문>(10월18일자)이 20대 이상 여성 1천명을 대상으로 지지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몽준 후보(31.4%)가 1위를 차지했고, 이회창(20.4%) 노무현(18.1%) 후보가 그 뒤를 이었다. 이는 정책과 이미지가 별개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위인 정후보는 아직 변변한 여성 공약 하나 내놓지 못했다. 지지자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분명한 정책(14%)보다는 이미지가 좋아서(78%)라고 답한 이가 압도적이다. 반면 노무현 후보는 정책은 믿을 만하나, 흡인력은 떨어진다. 여성 문제에 관한 식견이 가장 뛰어난 인물, 여성 장관 기용에 긍정적일 것 같은 인물 항목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받고도 정작 표심을 얻지는 못한 것이다.


정후보측이 공공연하게 클린턴 효과를 들고 나오는 것은 이런 여성들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대선자문교수단 주준희 교수는 “현재 얻은 이미지에 진보적인 여성 정책을 더해 여성 표 굳히기에 들어간다”라고 말했다. 여성계가 내걸고 있는 3대 핵심 과제는 물론 다른 후보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을 여성 정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호주제 폐지에 유보적인 이회창 후보와도 명확히 차별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회창 후보는 딱딱한 이미지를 벗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여성신문> 여론조사에서 2위를 차지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새 바람과는 거리가 있다. 여성 지지자의 40%가 50대 이상이기 때문이다. 여대생과 햄버거 조찬회를 갖는 등 젊은 여성을 잡기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 노선에 비추어볼 때 이후보는 운신할 폭이 좁다. 그는 지난 10월23일 여성단체협의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대선 후보로는 처음으로 여성 정책에 관한 구상을 드러냈는데, 여성계가 큰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는 호주제 폐지에 난색을 표했다. 유림이 반발한다는 이유다. 대신 그는 호주 승계 순위를 조정하고 친양자 제도를 고쳐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노라고 말했다.


색깔로 볼 때 여성 표를 잡는 데 결코 불리하지 않아 보이는 노무현 후보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위 여론조사에서, 50대 이상의 확실한 지지에 힘입은 이회창 후보에게도 밀렸기 때문이다. 민주당측은 내홍이 길어지면서 눈에 띄는 여성 공약 하나 내보일 틈이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민주당 여성국 유승희 국장은 “정책 대결이 시작되면 승산이 있다. 신뢰도가 높지 않은가”라고 낙관했다. 동시에 호감도를 높이기 위한 이미지 전략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수줍은 남자, 귀여운 남자의 이미지를 부각한다는 전략이다. “노 후보가 낯가림이 심하다. 막말로 그 흔한 ‘누님’ 소리도 못한다. 사람이 순수해서 그런 것이다.”


“평소 언행 따져 ‘마초 지수’ 마련하겠다”


출산율이 곤두박질하고 여성에 대한 고용 불안이 심해지는 현실을 감안한 탓인지, 호주제를 제외하고 각 후보의 정책은 사실 대동소이하다. 정부의 보육 부담을 50%까지 끌어올리고, 여성 고위 공직자 비율을 30%로 유지하며 공천 비율을 50% 선으로 유지하는 등 기본 골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영 페미니스트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올해 초 박근혜 지지론이 불거져 나왔을 때,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닌 여성주의적인 대통령이 중요하다’며 ‘여성계 큰 언니’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여성해방연대가 한 예다. 대선을 앞둔 이 단체의 기본 입장은 ‘찍을 당도, 찍을 후보도 없다.’ 하지만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을 작정이다. 영 페미니스트 박지민씨는 “정책이야 비슷비슷할 것이다. 평소의 언행을 따져 ‘마초 지수’ 같은 것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현재 인기가 높은 정몽준 후보도 이 잣대로 재면 마초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박씨는 최근 양심적 병역 거부 관련 시위를 하고 있던 여학생들에게 “여자가 왜 군 문제에 관심을 갖느냐”라고 발언한 것 등을 문제삼았다. 과반수 여성 표가 이미지 전략 따위에 말려들게 놔두지 않겠다며 여성계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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