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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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이 요동하고 있다. 지주 회사 격인 SK(주)는 적대적 합병· 매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SK텔레콤의 분리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룹 분해설’까지 나오는 가운데 모든 계열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3월14일 열린 SK (주) 주주총회. 의장을 맡은 SK(주) 황두열 부회장은 현 경영진 퇴진과 주가 부양책을 요구하는 주주들의 거친 항의에 2시간 내내 진땀을 흘렸다. 한 소액 주주는 SK글로벌 분식 회계 사태를 처음 불이 난 열차에서보다 옆에 있던 열차에서 희생자가 더 많이 났던 대구 지하철 참사에 비유하며, SK글로벌에서 시작된 불이 SK(주)로 더 크게 옮겨 붙을까 봐 불안해 죽겠다고 호소했다. 황부회장은 앞으로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절대 내리지 않겠다며 진화에 나섰으나 주주들의 불안감을 완전히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SK(주) 주주들은 SK(주)가 SK그룹의 사실상 지주 회사이며 SK글로벌의 최대 주주(지분율 38.68%)여서 SK글로벌 불똥이 SK(주)에 어떤 식으로든 튈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SK글로벌이 1조5천억원대 회계 분식을 했다고 검찰이 발표한 3월11일 이후 SK그룹 전 계열사는 호떡집에 불이 난 형국이었다. 저마다 SK글로벌과의 꼬리 자르기에 북새통을 떨었다. 3월11일 주가가 무려 2만원이나 떨어지자 그날 밤 SK텔레콤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SK글로벌 정상화를 위해 공정거래법 등을 벗어난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을 것이며, SK글로벌에 대한 채권 규모는 32억원에 불과하다는 요지의 긴급 공시를 낸 것이다. SK(주) 역시 재무 건전성을 강조하며 세계적 신용평가 기관인 S&P와 무디스측과 접촉하며 SK글로벌 불길을 차단하는 데 부심했다. SKC·SKC&C 같은 계열사들도 SK글로벌과의 상거래 내역과 내부 유동자금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SK글로벌을 떼어내느라 바빴다. SK글로벌이 그룹의 모태 기업이니 자식들이 못난 부모를 부정하는 형국이 빚어진 것이다.
창립 50주년(4월8일)을 코앞에 두고 SK그룹은 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3월11일 이후 단 4일 동안 SK글로벌과 SK(주)의 주가는 거의 반 토막이 났다. SK글로벌 채권이 편입된 투신권 펀드의 환매(투자자금 인출) 금액도 같은 기간에 무려 14조원에 달했다. 분식 회계 여파로 SK글로벌의 신용등급도 무려 열두 단계나 강등되는 등 SK 계열사들이 신용평가 기관들로부터 냉대를 당했다. 시장의 응징은 3월14일을 기점으로 한풀 꺾이는 모양새다.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주식 시장과 채권 시장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하나은행 등 8개 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이 SK글로벌에 기업구조조정촉진법(옛 워크아웃)을 적용해 공동 관리하기로 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고, SK가 그룹 전체가 부실에 빠진 대우나 현대와는 다르다는 시장의 평가도 주효했다. 정부의 SK 사태 사령탑인 금감위대책반이 채권단의 방어선은 SK그룹이 아니라 SK글로벌에 쳐져 있다면서 SK글로벌 사태가 그룹 유동성 위기로 치닫는 것을 차단하고 나선 것도 금융 시장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계열사 간에 순환 출자 사슬이 거의 끊겼고 상호 지급 보증 규모도 크지 않아 연쇄 도산할 염려가 없다는 사실이 시장 관계자 사이에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SK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SK글로벌에 쳐진 방화벽이 무너져 그룹 유동성 위기로 비화할 공산은 희박하지만, 글로벌 회생과 관련한 여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채권단이 계열사들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분명히하고 있는 것이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SK글로벌이 조기에 정상화하려면 회사 자체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계열사들이 적극 지원에 나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시민단체나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매우 부정적이다. 특히 참여연대는 SK텔레콤이나 SK(주)가 지분 매입이나 증자 참여 등의 방법으로 SK글로벌을 우회 지원함으로써 주주들에게 손실을 끼친다면 즉각 외국인 투자가들을 동원해 응징에 나서겠다고 벼르고 있다. SK그룹에서 돈을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두 회사 경영진에게 이 참에 SK글로벌과 결별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도 계열사 경영진이 SK글로벌과 분명한 선 긋기를 시도하지 않으면 시장의 보복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계열사를 동원해서라도 SK글로벌을 살리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글로벌이 살 길은 자체 역량으로 찾아야 한다.”

SK(주)의 한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지주 회사 구실을 했던 현대중공업이 계열사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독자 생존할 수 있었다는 교훈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적법한 선에서 지원 여부를 검토하고는 있지만, 시장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SK(주)는 SK글로벌이 가지고 있는 주유소를 매입하는 데, SK텔레콤은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시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들이나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SK글로벌이 SK그룹의 모태 기업이라는 점에서 계열사들이 심정적으로 선을 긋기가 매우 어렵겠지만, 결국 자기네가 살기 위해 단절을 도모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리라고 본다. 이른바 독립경영론이다. 증권가에서는 벌써부터 SK(주)와 SK텔레콤이 합병·매수(M&A) 등의 방법으로 그룹에서 분리될 것이라는 분석까지 제기되고 있다. 세종증권은 최태원 회장이 모든 보유 주식을 채권단에 담보로 내놓음에 따라 사실상 지배 주주 위치를 잃어 구심점이 없어진 상태에서 지주 회사 격인 SK(주)가 적대적 합병·매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그룹이 분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SK(주)는 자사주(10.4%)를 빼면 SKC&C 등 특수 관계인 지분이 12.8%에 불과하다. 주가마저 급락한 상태다. 누군가가 2천억∼3천억 원을 동원해 지분 20∼30%를 사들인다면 자산 규모 47조원이며 국내 재계 서열 3위인 SK그룹을 사실상 접수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그룹의 최우량 기업인 SK텔레콤마저 분리된다면 SK그룹은 그룹 모습을 보전하기 어려워진다. 메릴린치증권은 SK텔레콤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SK텔레콤이 독립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증권사는 SK글로벌을 정상화하기 위해 채권단이 SK글로벌의 최대 주주인 SK(주)에 자본 투입 및 자산 매각 따위 책임 분담을 요구할 것이고, SK(주)는 결국 보유한 SK텔레콤 주식 19.81%를 매각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주식을 해외의 전략적 투자자나 채권 은행 혹은 SK텔레콤 스스로 사들일 수밖에 없어 SK텔레콤이 그룹에서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이다. SK그룹 내부에서는 SK(주)를 사업 지주 회사로 전환시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도가 현실화하기에는 난점이 적지 않다. SK(주)가 법적인 지주 회사가 되려면 부채 비율이 100% 이내가 되어야 하는데 2001년 말 현재 부채 비율은 152.1%나 된다. 또 계열사 지분도 일정 비율(상장사는 30%, 비상장사는 50%)을 사들여야 하는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부 재계 관계자들은 SK그룹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해체된 일본 재벌이나 포스코 같은 지배 구조를 갖는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한다.

아직 SK그룹이 공중 분해되리라는 예측은 섣부르다. 정부는 SK그룹의 지배 구조는 채권단과 주주들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고 밀쳐놓고 있다. 결국 SK그룹의 미래는 사법적 심판대에 오른 최회장의 미래와 SK글로벌의 경영 정상화가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SK그룹 계열사들은 그룹 우산 속에 있더라도 전문경영인 중심의 독자 경영 체제로 빠르게 줄달음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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