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먼저 바닥 난 국민연금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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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액 인하’ 정부 결정에 불만 폭발…“4대 연금 동시 개혁해야”
‘국민이 봉이냐’국민연금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보건복지부 등 인터넷 사이트에는 정부가 ‘노(老)테크’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던 약속을 저버렸다는 성토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심지어 ‘결사반대 국민연금’이라는 온라인 모임은 최근 국민연금 강제(의무) 가입을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국민들의 분노가 비등한 것은 최근 정부와 민주당이 1천7백만명에 육박하는 국민연금 가입자의 연금 수령액을 깎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4대 연금 가운데 일반 국민은 가입하지 못하는 공무원· 군인· 사학 연금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령액을 높여준 것이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당·정이 국민들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한데도 혜택을 줄이기로 결정한 까닭은 기금이 고갈하리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현행 체제(보험료율 9%, 소득대체율 60%)를 유지하면 2036년부터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아져 2047년께면 기금이 완전히 바닥 날 것으로 추정된다.

적립 기금은 지난 5월16일 100조원을 돌파했다. 문제는 2035년 최고 1천7백15조원까지 늘어났다가 그 다음해부터 기금이 무서운 속도로 급감한다는 사실이다. 2047년 보험료 수입은 총지출액의 29.4%에 불과하다. 무려 1천7백조원에 달하는 기금이 불과 12년 만에 완전 소진되는 것은 2015년께부터 연금 수급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1988년부터 가입한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0∼1960대 출생자) 들이 연금 생활자가 되는 것이다.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를 부양해야 할 세대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이른바 저출산 세대들이다. 게다가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인구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1998년에도 소득대체율(가입 기간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지급액)을 70%에서 60%로 낮추는 등 연금 구조에 손을 댔다. 그러나 반발을 염려한 미온적 대응 탓에 고갈 시기를 16년 가량 늦추었을 뿐이었다.

재정 위기감이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마디로 1988년에 도입될 때부터 ‘저부담· 고급여’구조로 설계된 탓이다. 재정 안정화를 이루는 방법은 간단하다. 저부담·고급여 설계를 고부담·고급여로 하든지 저부담·저급여 구조로 바꾸면 된다. 2002년 3월 보건복지부장관 자문기구로 발족한 국민연금발전위원회(위원장 송병락 서울대 교수)가 지난 5월 내놓은 개혁안은 세 가지였다.

제1안은 고부담·고급여 구조다. 현재의 소득 대체율 60%를 유지하되 2070년 기금의 목표 적립률을 2배(수입이 전혀 없어도 2070년 이후 2년간 지불 능력 보유)로 가져가려면 보험료율을 2030년에 19.85%로 대폭 끌어올려야 한다. 이 요율이 2070년까지 유지된다. 1999년부터 2009년까지 9%인 보험료율을 한꺼번에 올리는 것은 아니다. 2010년부터 2030년까지 5년마다 2.17% 포인트씩 다섯 차례 올린다.

제3안은 저부담·저급여 구조인데, 당장 2004년에 소득대체율을 40%로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2010년부터 2030년까지 보험료율을 5년마다 0.57% 포인트씩 인상해 2030년 11.85%를 2070년까지 유지하면 된다. 문제는 제3안의 경우 가입자들이 받아들이기는 가장 수월하지만 기초 생계비(2001년 1인 가구 기준 34만원)도 보장하기 어려워 개인연금 등 다른 대비가 없는한 생계를 꾸리기가 힘겨워진다.

1안의 경우는 20년 가입 평균 소득자의 매월 급여액이 40만원으로 기초 생계비 수준을 웃돌지만, 보험료 부담이 크다. 게다가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의 대다수는 국민연금뿐만 아니라 의료·고용· 산재 보험 같은 다른 사회보험료도 지출하고 있다. 1안과 3안이 가진 결함을 누그러뜨린 것이 2안이다. 급여와 부담 수준 적정성을 두루 감안한 것으로, 소득대체율을 50%로 떨어뜨리는 안이다. 2안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30년까지 5년마다 보험료율을 1.37% 포인트씩 인상해 2030년에 15.85%으로 끌어올리며 이 수준을 2070년까지 유지한다. 그러면 기금 고갈 시기를 2070년까지 늦출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정부안이었던 2안은 국회에서 다소 변질되었다. 민주당이 내년부터 갑자기 소득 대체율을 10% 포인트 낮추는 것은 충격을 주므로 2009년까지 55%를 적용하고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50%로 떨어뜨리자는 수정안을 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대다수 연금개혁론자들은 내년 총선을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차피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이 조정되어도 소급 적용을 하지 않아 기득권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나 연금을 받으므로 자동적으로 민주당에서 말하는 완충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개혁론자들은 반드시 2010년에 50%로 조정한다는 계획을 법제화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이상석 연금보험국장은 “당·정 협의안을 8월 초 입법 예고할 계획이다. 2안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지만, 보험료율은 다소 조정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민연금 개혁에 대해 ‘용돈제가 되면 안된다’며 급여 수준을 깎을 뜻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4월까지만 해도 현행 수준을 유지하는 것에 무게를 실었다. 요원해 보였던 연금 개혁이 급물살을 탄 것은 박봉흠 기획예산처장관이 적극 개혁을 주장했고, 조윤제 경제보좌관 등이 노대통령을 설득한 결과 노대통령으로부터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면 해야죠”하는 동의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연금 가입자 처지에서 혜택이 줄어드는 것을 반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연금 개혁은 정치적으로 가장 인기 없는 정책이다. 하지만 연금 개혁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본격적으로 연금 수령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저항이 커지고 그만큼 후세대에게 부담이 전가되기 때문에 이른바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현재 국민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국민연금이 파산하면 돈을 떼인다’는 잘못된 믿음 탓에 연금무용론이 나오고 심지어 가입 거부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오해다. 설령 2047년에 기금이 고갈되더라도 국민연금은 국가가 지급을 보장하는 법정 사회보험이기 때문에 연금 지불을 미룰 수도 멈출 수도 없다.

그러나 기금 고갈의 부담은 고스란히 후세대에 전가된다. 후세대가 은퇴한 전세대를 부양하는 부과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필요 보험료율은 2050년 30%, 2070년에는 39.1%로 급증한다. 여기에다 다른 사회보험료까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후세대들은 소득의 50% 이상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세대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우는 것은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넘어 부도덕한 일이다. 게다가 현세대는 초기에 가입해 낮은 보험료율과 높은 소득대체율을 적용받았던 국민 연금 제도의 단물을 빨아먹은 사람들이다.

국민연금의 위기는 재정 위기가 아니라 정부가 자초한 신뢰의 위기다. 국민들이 보기에 똑같이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야 할 공무원·군인 연금에 대해서는 무딘 칼을 들이대면서 국민연금에만 날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 문형표 선임 연구위원은 4대 연금을 동시에 제대로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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