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감사 ‘덫’에 걸린 회계법인 업계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0.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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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징계 당하고 손해배상 소송 잇달아…외국 ‘빅5’의 압박도 거세
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5백50명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지난 10월5일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 국제회의실에서는 제12기 수습 공인회계사들의 회계연수원 입교식이 열리고 있었다. 20대 후반 젊은이가 대부분인 이들은 연수원에서 한 달간 교육을 받은 뒤 회계 법인에서 수습 기간 2~3년을 거쳐야만 공인회계사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이들 수습 회계사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회계사들 처지가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외환 위기 이후로 잇달아 불거져나온 회계 법인의 부실 감사 문제 때문에, 회계사의 위상은 ‘날개조차 없이’ 추락해 버렸다. 기아자동차의 감사인이었던 청운회계법인이 지난해 거듭된 징계 조처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지난 9월, (주)대우의 감사를 맡았던 산동회계법인은 12개월 영업 정지라는 사상 초유의 징계를 받으며 청운회계법인과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투자자들이 회계 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거는 사례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회계 법인들의 부실 감리로 말미암아, 장부상으로만 튼튼한 껍데기 회사에 투자해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회계 법인의 경우에는 위험이 따르는 만큼 수익을 거둔다는 ‘고위험-고수익’ 원칙도 적용되지 않는다. 회계 감사에 따르는 위험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반면 감사 보수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아래 표 참조). 지난해부터 감사 보수가 완전 자율화하면서, 회계 법인들 간에 가격 경쟁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외환 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선진 외국 회계 법인과의 제휴가 점차 ‘멍에’로 변해 국내 회계 법인들은 독립성을 위협받고 있는 처지에 몰렸다.
국내 회계 법인과 외국 회계 법인은 처음에는 거래 관계로 출발했다. 외환 위기를 겪으며 한국 회계 법인에 대한 외국인들의 불신이 커지자, 정부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제시하는 감사 보고서에는 반드시 외국 회계 법인의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고 못박아, 사실상 국내외 법인 간의 짝짓기를 강제했다. 국내 법인들은 ‘브랜드’를 빌리는 것과 함께 선진 회계 기법을 전수받는 대가로 상당한 로열티를 지불했다.

대신 국내 회계 법인들이 얻은 것은 막대한 규모의 일감. 금융기관·상장사 등 중·대형 업체의 감사를 비롯해 구조 조정을 위한 실사 작업 등을 독식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국내 회계 법인은 외국 법인에 종속되는 지경에 처했다. 영화회계법인 최종철 전무는 “이제 한국에서 빅 5냐 빅 6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잘라 말했다. 외국 회계 법인들끼리 합병·매수를 하게 되어 ‘빅5’가 ‘빅4’가 되거나 하면, 그 영향권 내에 있는 한국 회계 법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합병·매수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현재 외국 회계 법인들이 한국 회계 법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은 회계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원칙. 만약 회원사가 회계 감사를 불량하게 한다면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영화회계법인 문점식 이사는 “외국 법인들은 회계 서비스의 질을 전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해 전세계 회원사를 ‘하나의 회사’ 개념으로 통합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회계 전문가들 중에는, 대우그룹 부실 감사 문제를 빌미로 외국 회계 법인이 국내 회계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도 있다. 한 전문가는 “회계 보고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 법인이 인사권에 간섭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예상했다. 이미 국내 빅5 중에는 외국 회계 법인의 지점으로 전락한 회사가 있다는 것이 회계사들의 말이다.
결국 앞으로 한국 회계 업계가 어떻게 변해 갈지는 세계 회계 업계의 판도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세계 회계 업계의 주된 흐름은 회계업과 컨설팅업의 분리.

이런 흐름은 지난 8월 빅5 회계 업체인 아더 앤더슨과 컨설팅 업체 앤더슨 컨설팅이 결별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아더 래비트 위원장이 “회계 법인이 컨설팅업을 겸하는 것을 막겠다”라는 입장을 발표하자 이런 경향은 가속화했다. 래비트 위원장의 주장에 따르면, 회계 법인들이 본업인 감사 업무뿐 아니라 경영 컨설팅까지 겸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다가 본업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아더 앤더슨과 앤더슨 컨설팅이 결별한 이후,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 등 나머지 빅5 회계 법인들도 자사의 컨설팅 사업본부를 매각하며 회계업과 컨설팅업을 분리하고 있다. 이는 국내 회계 법인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회계 전문가들의 진단.

회계업과 컨설팅업이 분리될 경우, 감사의 질이 높아질지는 미지수이지만 회계 감사 수수료가 인상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특히 미국과 비교해 감사 보수가 10분의 1 수준인 한국의 경우, 삼일 등 빅5가 제시하는 감사 보수가 대폭 인상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회계 법인들이 감사에 집중하면 할수록, 회계사들이 진출하는 영역은 그만큼 넓어질 것이라고 회계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금도 컨설팅 업체뿐만 아니라, 금융기관·기업 평가 회사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회계사가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이러한 회계사들의 ‘엑소더스’는 가속화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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