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시장 새 주역 퓨전 상품이 몰려온다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0.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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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상품, 소비 시장의 새 주역으로 떠올라… 요리·인테리어에서 가전까지
이제는 ‘퓨전(fusion)’이다. 이종교배·융합·용해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1970년대 퓨전 재즈 장르가 태동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문화 용어’. 하지만 최근 퓨전 개념을 내세운 상품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소비 산업의 키워드로 각광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퓨전 상품은 요리. 서울 청담동 일대에 자리한 퓨전 레스토랑들은 퓨전 요리 붐을 일으킨 진원지다. 1997년부터 생겨난 이들 레스토랑은 샐러드에 일본식 간장 소스를 얹거나 고추장·된장 소스를 서양식 고기구이에 얹는 등 독특하면서도 한국인 입맛에 맞는 요리로 최신 유행에 민감한 20·30대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동서양이 ‘한 접시 위에서 만나는’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은 청담동 근방에만 약 50개. 퓨전 레스토랑 ‘시안’의 매니저 박종윤씨는 “퓨전이란 말이 붙지 않으면 장사가 안될 정도다”라고 말했다.

퓨전 요리를 파는 곳은 일류 요리사의 ‘작품’을 파는 레스토랑뿐만이 아니다. 대형 요식업체들 역시 퓨전 스타일 제품을 내놓고 있다. 롯데리아가 내놓은 쌀로 만든 햄버거 라이스 버거나 피자헛이 판매하는 불갈비 피자 같은 제품은 퓨전 패스트푸드의 전형적인 사례다.

마르쉐·TGI 프라이데이 등 패밀리 레스토랑들은 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다국적 레스토랑’을 추구한다. 한 장소에서 퓨전 요리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요리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마르쉐의 경우 퓨전 롤·허브 회덮밥 등 퓨전 요리뿐만 아니라 한·중·일식에 유럽·미국·멕시코 요리 80 가지를 제공하며 2~3주 간격으로 메뉴를 바꾸고 있다.

요리뿐만 아니라 생활 공간을 꾸미는 인테리어 분야에도 퓨전은 새로운 조류이다. 퓨전 개념을 담은 장식재·가구 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LG화학 장식재사업부 박경환 상무보는 “집은 튼튼하면 그만이라는 기능 중심 시대에서 기능과 감각이 동시에 중시되는 디자인 시대로 발전했기 때문이다”라고 퓨전 제품의 인기를 분석했다.

퓨전 인테리어 제품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젠 스타일 제품들. ‘젠’은 불교 수행 방법 중 하나인 ‘선(禪)’의 일본어 발음에서 따온 단어이다. 은은한 색상, 부드러운 곡선, 절제된 패턴으로 구성된 젠 스타일은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준다.
요리·인테리어 분야에서 퓨전이 주로 동서양 문화의 결합으로 표현된다면, 패션 분야에서는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패션 전문지 <보그 코리아> 이명희 편집장에 따르면, 외국 유명 디자이너들은 이미 1940~1950년대부터 퓨전 스타일을 제시해 왔다. 지금도 존 갈리아노·알렉산더 맥퀸 등 유명 디자이너들은 중국과 일본 의상에서 영감을 얻은 의상을 발표하고 있다.

동서양의 융합을 넘어서 패션 분야에서는 나이·계절·컬러·소재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퓨전’이 이루어지며 옷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고 있다. 두꺼운 여름옷이나 얇고 비치는 소재를 사용한 겨울옷이 등장하는가 하면, 낚시복·등산복처럼 보이는 옷이 일반 캐주얼 의상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무차별 퓨전 경향은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핸드폰이 인기를 끌면서 ‘전화기는 전화만 걸고 받는다’는 고정 관념은 이미 깨졌다. 삼성전자가 올 상반기에 내놓은 MP3 플레이어와 핸드폰을 결합한 MP3폰이나 TV폰, 시계와 결합된 초소형 핸드폰은 앞으로 어떤 핸드폰이 개발될 것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퓨전은 약과다.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텔레비전·냉장고가 개발되고, 가전제품들은 인터넷과 융합된 ‘정보 가전기기’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냉장고에 내장된 장치를 통해 인터넷에서 조리법을 검색해 요리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인터넷으로 전자 상거래를 하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21세기에 보편화할 첨단 기술 중 하나로 꼽히는 블루투스 기술이 상용화하면 가전기기의 ‘진화’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블루투스는 가전·통신 기기에 무선통신 모듈을 부착해 기계들끼리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기술. 휴대폰으로 텔레비전이나 오디오를 작동할 수 있으며, 안방에서 VTR를 작동해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비디오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전문가들은 1~2년 안에 블루투스 기술이 상용화할 것으로 내다본다.
복합 공간을 의미하는 ‘퓨전 스페이스’는 퓨전의 또 다른 양상. 젊은이가 많이 모이는 신촌·명동·압구정동에서 생겨나고 있다. PC방과 비디오방을 결합한 미용실, 댄스 게임기와 스티커 사진 촬영기를 함께 가져다 놓은 ‘포토 게임장’,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지치면 만화를 읽는 만화방 겸 PC방 등은 서로 다른 업종을 한 공간에 결합한 경우들이다.

퓨전 스페이스의 또 다른 사례는 운동과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이다. 지난 7월 서울 명동에 생긴 캘리포니아 피트니스 센터(CFC)는 운동과 오락을 결합한 ‘엑서테인먼트’를 내세우고 있는 퓨전 헬스클럽. 전면이 유리로 된 5층짜리 건물에 있는 이 곳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귀를 울리는 테크노 음악과 화사한 국부 조명으로 나이트 클럽 같은 느낌을 주는 헬스클럽이다. 감각적이고 모던한 인테리어, 요가·힙합·킥복싱 등을 가르치는 다양한 에어로빅 강좌가 ‘헬스클럽은 지루한 곳’이라는 고정 관념을 깨고 있다. 한국 지점을 포함해 전세계 4백11개소 지점에서 여성 회원 비율이 70%가 넘는다.

요식업·인테리어·가전기기에서 복합 공간에 이르기까지 퓨전 현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면서 ‘우리가 본격적인 퓨전 브랜드’임을 표방하는 상품도 나왔다. LG 텔레콤이 ‘퓨전 커뮤니케이션’ 개념으로 내놓은 이동통신 브랜드 ‘카이’가 그렇다. 주 고객층인 17~24세가 선호하는 패션·스포츠·음악·공연·인터넷 등 젊은 문화를 휴대폰 하나에 ‘융합’하겠다는 것이 LG 텔레콤측의 설명이다.

이렇게 퓨전 상품이 잇달아 출시되며 소비 산업의 중요한 키워드로 각광받게 된 이유로, 마케팅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점을 꼽는다.

먼저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쉬워졌다는 사실이다. 소비자 운동이 활발해지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소비자들이 제품 정보를 얻기가 예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제일기획 브랜드컨설팅그룹 김기수 차장은 “여러 상품의 질과 가격 및 기능을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많아졌다”라고 말했다. 이제 한 제품·한 가지 기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비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유필화 교수(성균관대·경영학, 마케팅)는 퓨전 현상을 부채질하는 요소로 ‘문화 욕구’를 꼽는다. 문화 소비 욕구가 큰 계층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우선, 부자는 아니지만 생활에 여유가 있는 맞벌이 중산층. 이들은 제품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래 문화’와 최신 유행에 민감한 10~20대 젊은이들 역시 퓨전 제품의 주 소비층이다.

앞으로 어떤 퓨전 상품이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마케팅 전문가들은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앞으로 더욱 많은 퓨전 제품이 출현해 소비 시장을 주도하리라는 것이다. 제일기획이 소비자 3천5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0년 전국 소비자 조사’는 이런 예측을 뒷받침하고 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유필화 교수는 “데이터 베이스 마케팅이 정착할수록 퓨전 경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장르·문화·기능을 융합하는 것이 퓨전 경향인 만큼, 소비자들의 욕구를 정확히 분석해 낼 수 있다면 더 정확한 ‘퓨전’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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