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디지털 CE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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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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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챔버스 등 새로운 경영자 모델 각광… ‘기업 수준=자기 가치’ 인식해야
최근 삼성경제연구소는 〈디지털 시대, 새로운 CEO의 조건〉이라는 보고서에서, 디지털 혁명이 본격화하면서 새로운 최고 경영자(CEO;Chief Executive Officer)들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로 30∼40대에 집중되어 있는 이 ‘디지털 CEO’들은 과거 전통적 기업의 경영자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지명도와 영향력이 크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를 마감하며 1999년 ‘올해의 인물’로 인터넷 기업 아마존의 최고 경영자 제프 비조스(36)를 선정한 것도 그같은 시대 조류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타임〉은 1927년부터 매년 같은 행사를 되풀이해 왔지만, 기업인을 올해의 인물로 내세운 예가 흔치 않았다.

‘디지털’이라는 대세를 외면하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확산되고, 전통 기업에서 디지털 기업으로 권력 이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 시대가 이러한 탓에 ‘역전 노장’ 최고 경영자들의 경험과 지식은 진부한 유산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반면 새로운 변화의 조류를 잘 감지하고 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젊은 디지털 CEO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친다.

현재 세계 최고 기업으로 평가되는 시스코 사의 존 챔버스 회장(52)이나 소니를 세계 정상급 디지털 기업으로 끌어올린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62)의 예에서 보듯, 디지털 CEO라고 해서 반드시 젊지는 않다. 한국에서도 벤처 기업 1세대이면서 디지털 혁명에 적극 대응하고 있는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63)이나 메디슨 이민화 사장(47)의 나이는 결코 적지 않다.
그렇다면 디지털 CEO란 어떤 유형의 최고 경영자들을 가리키는가. 삼성경제연구소는 다음 다섯 가지를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최고 경영자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첫째, 아이디어(Idea):‘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아마존 사장 제프 비조스는 아날로그 제품인 책을 디지털 매체인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려는 생각을 가장 먼저 실행에 옮겼다. 쓰리컴(3Com) 사장 에릭 베나우도는 직장인들이 사무실이 아니라 병원·식당 등 어디에서든 PC를 네트워크에 접속하게 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최고 히트 상품이 된 ‘팜파일럿(Palm Pilot)’을 개발했다.

둘째, 스피드(Speed):‘신속하게 판단하고 행동해 기회를 선점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델컴퓨터의 마이클 델은 모두 사업을 빨리 시작하려고 다니던 대학을 중퇴한 최고 경영자이다. 제프 비조스는 28세에 월스트리트의 한 투자회사에서 수석 부사장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전자 상거래 시장이 그 전년에 2400% 성장했다는 발표를 접하자마자 기득권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팔 만한 상품 목록을 작성한 뒤 직원 7명과 함께 시애틀의 한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셋째,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탁월한 설득력을 갖춘다.’ 새로운 최고 경영자들은 사업 설명회를 통해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직접 유치할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경우가 많다. 이들은 회사를 상장한 뒤에도 언론 매체나 각종 강연·행사 등을 통해 회사를 알리는 데 주력한다.

넷째, 파트너십(Partnership):‘인맥을 널리 구축하고 사업의 과실은 공유한다.’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최고 경영자일수록 인맥을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다. 시스코 사장 존 챔버스는 개인 일정의 절반 이상을 외부 인맥을 구축하는 데 할애한다. 또 스톡옵션을 통해 사업 성과를 동료 직원들과 함께 나눈다.오너 경영, 기존 장점마저 단점 될 수 있어

다섯째, 파라노이아(Paranoia;편집증):‘집중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텔의 앤디 그로브는 〈오직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 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라는 저서에서, 과거나 현재의 승리에 안주하지 말고 편집증 환자처럼 계속 일에 몰두해야 미래에도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전통 기업들에서 디지털 CEO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너 경영’이 주류를 이루는 현실이어서 더욱 그렇다. 최근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에서도 드러났듯이, 오너 경영의 상징인 재벌들은 아직도 상장 기업을 사유물로 생각하는 전근대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너 경영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독일·이탈리아 같은 유럽 선진국에서는 몇 대째 경영권을 세습하면서도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끌어 오는 예가 많다. 다만 한국처럼 대기업의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고, 대개 특정 분야를 천착해 온 군소 기업이 많다.

오너 경영은 경영권을 세습하는 후계자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최고 경영자 훈련을 쌓을 수 있다는 점,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기회가 많아 인맥이 두텁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급변하는 디지털 혁명기에 접어들면서 장점이 반대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전통적 경영 방식이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또 선대부터 늘려온 생산 설비들이 변신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세상에 민첩하게 적응하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운 것이다.그렇다고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능력 있는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기란 더욱 힘들다. 구본형 소장(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은 “자기 자신을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것보다 자기가 경영하는 기업의 수준을 가늠해 자기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쪽이 더 낫다”라고 지적했다.

구소장은 최근 발간한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생각의나무 펴냄)에서 기업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잣대를 제안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경영 품질 모델인 ‘맬컴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모델’이 그것이다. 볼드리지 모델은 미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현실에서 ‘세계 표준’으로 받아들일 만한 우수한 기업 평가 수단이다.

기업의 경영 수준을 평가하고 뛰어난 곳에는 포상하는 볼드리지 모델은 1987년 미국 상무장관 맬컴 볼드리지가 제안한 것이다. 이 상을 제정한 목적은 일본 기업에 밀리며 힘을 잃어 가던 당시 미국 기업들에게 경쟁력을 되살려 주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경영을 지도한다는 것이었다.

1988년부터 시행된 이 경영 모델은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모델이 되었다. 1999년부터는 비영리 조직인 학교와 병원에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현재 40개 주 이상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경영 품질 시상 제도를 운영하는 25개 주요 국가 가운데 18개국이 이 모델과 비슷한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

볼드리지 모델은 일곱 가지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한다. 1.리더십 2.전략 기획 3.시장과 고객 4.정보와 분석 5.인적 자원 6.프로세스 관리 7.경영 성과이다. 1000점 만점 가운데 경영 성과는 배점이 450점에 달해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성과가 좋지 않으면 평가를 높게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경영 성과 항목은 원래 배점이 180점이었는데,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따라 그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0년간 꾸준히 비중이 늘어났다.최고의 기업 평가 방법 ‘볼드리지 모델’

경영 성과를 제외한 여섯 가지 기준 중에서 배점이 가장 높은 항목은 리더십(125점)이다. 다른 기준들은 배점이 모두 85점으로 똑같다. 최고 경영자의 리더십이란, 기업이 지향할 미래를 그려 놓고 그것을 현실화해 가는 능력을 의미한다. 가장 뛰어난 경우는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최고 경영자이다.

볼드리지 모델의 일곱 기준 가운데 한국의 최고 경영자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들로는 ‘전략 기획·정보와 분석·프로세스 관리’ 세 가지가 꼽힌다.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독점 판결을 받은 뒤 분할 위기에 처하면서 사세가 휘청거리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위기는 빌 게이츠가 말한 스마트 피플, 즉 오늘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있게 한 참신한 인재들이 회사를 떠나고 있으며, 남아 있는 직원들도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업무에 전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신경제를 주도했고 디지털 경영 시대의 대표 주자로 꼽혀 온 마이크로소프트 사 역시 덩지가 커지면서 ‘대기업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최고 경영자를 선장에 비유한다면, 그의 진가가 빛을 발하는 때는 따스한 햇볕과 든든한 순풍이 동반하는 순항기라기보다는 풍랑을 만나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위기의 순간일 것이다. 그런 순간에 무엇이 최고 경영자의 정확한 판단을 이끌 나침반과 북극성이 되어 줄 것인가. ‘가장 성공적인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포착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음미할 때다.

蘇成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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