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도 톡톡 튀는 ‘신세대 산업’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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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20대 초반 겨냥한 패 션·음반 매출 ‘신바람’…차별화 전략이 호황 요인
“우리는 감성 세대이다. 그만큼 패션에 민감하다. 먹고 입는 데 돈을 많이 쓴다. 바지는 10만~16만원 가량 되는 NIX·GV2·보이런던·96뉴욕을 입고 이스트팩이나 아이삭 같은 가방을 멘다. 20만원이 넘는 가방도 마음에 들면 용돈을 아껴서 산다. 어떤 친구는 점심을 굶으며 돈을 마련한다. 하지만 돈이 부족하지는 않다. 보통 과외나 서빙 같은 부업을 해 돈을 마련한다. 돈 많은 부모를 둔 애들은 말할 것도 없다.

통바지는 GV2, 몸에 착 달라붙는 시가렛 팬츠는 96뉴욕, 일자 바지는 NIX, 힙합 바지는 보이런던이 인기가 있다. 96뉴욕이나 시스템이 인기 있는 이유는 재미있다. 이 제품들은 치수가 작게 나와 마른 사람에게만 어울린다. 이 옷을 입으면 몸매가 좋다고 인정받게 되고, 정말로 입으면 폼이 난다. 이 옷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하는 친구도 있다. 그래서 살 빼는 업소가 한때 성행했다. 패션 정보는 방송이나 패션 잡지에서 얻는다. 쇼핑 장소는 이대 입구·돈암동·이태원이다. 특히 힙합 바지는 이태원에 가야 괜찮은 것을 구할 수 있다.”(성신여대 통계학과 95학번 임수정양)


10대 후반~20대 초반 신세대는 왕성한 구매력을 자랑한다. 풍요 속에서 자라난 이들은 멋과 맛을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불황의 그늘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기성 세대는 이들의 소비 행태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영상 문화의 세례를 받은 신세대는 패션과 대중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패션과 음반 시장을 주도한다. 청바지와 청재킷으로 대표되는 진(jean) 시장은 신세대 구매력에 힘입어 지난해 80% 가량 늘어났다. 올해도 40%쯤 성장하리라 예상된다. 한국음반소매업협회 이용범 사무장은 연간 음반업체 전체 매출액 6천억원 가운데 신세대 소비가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의류와 음반 업체처럼 신세대에 목숨을 건 업계에서는 주고객인 이들의 취향을 맞추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신세대의 소비 성향은 변덕스럽기 그지없어서 시장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신세대의 소비 성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공중파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이다. 롯데백화점 판매본부 우길조 주임은 “하이틴 스타는 걸어다니는 광고판이다. 업체들마다 인기 연예인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자기 옷을 입히기 위해 안달이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진 브랜드인 보이런던은 서태지와아이들 멤버였던 이주노가 입은 후부터 빠르게 성장했다. 요즘 마리테프랑소와저버가 인기 댄스 그룹인 언타이틀에게, 미치코런던이 주주클럽에게 의상을 협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세대 취향 꿰뚫은 국산 진 나오자마자 불티

그렇다고 신세대의 감각이 공중파 방송의 영향력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다. 신세대는 <엘르> <휘가로> <마리끌레르> 같은 패션 잡지를 들춰 보기도 한다. 여기에서 얻은 정보는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공유한다. 하이텔 go mode나 천리안 패션 동호회에 가면 요즘 신세대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에 대한 견해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이텔 mode방에만 이런 글이 1만7천7백여 개 올려져 있는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가 국산 청바지 상표이다. 신세대의 취향을 정확히 간파해 성공한 업체가 청바지 제조업체이기 때문이다. 3~4년 전만 해도 게스·캘빈클라인·리바이스가 내수 시장을 주도하면서 국내 청바지 업체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독특한 디자인을 원하는 신세대들이 뚜렷한 개성이 없는 미국 정통 진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때 국내 업체가 독특한 개성을 가진 패션 진을 시장에 내놓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패션 진 업계에서 가장 눈부시게 성장한 업체는 태승트레이딩이다. 태승트레이딩이 94년 초 출시한 패션 진 NIX는 신세대 사이에서 NIX동호회가 생겨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NIX가 지난해 거둔 매출액은 1천1백억원으로, 95년에 비해 22% 늘었다. 출범한 지 4년 만에 천억원대 브랜드로 성장한 것이다.

태승트레이딩은 NIX를 출시하면서 철저히 17~25세 신세대에 초점을 맞추었다. 디자인에서부터 광고·판촉에 이르기까지 신세대의 취향과 감각을 염두에 두었다. 특히 긴 다리를 선호하는 신세대 심리를 감안해, 바지 전체에 세로로 줄을 내어 다리가 길어 보이게 한 디자인이 주효했다. 가격은 외국 제품보다 비싸게 책정했다. 또 NIX라고 쓰인 금속 징을 뒷주머니에 박아 유명 고가 브랜드를 입었다는 과시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었다. 태승트레이딩은 NIX의 성공에 힘입어 95년 8월 292513=STORM이라는 새 브랜드를 내놓았다. 이 브랜드는 NIX보다는 못하지만 꾸준히 매출이 늘고 있다.

NIX가 일자 바지인 데 반해, 지브이사가 94년 출시해 역시 신세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GV2는 통바지이다. GV2는 단순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강조해, 고급스러우면서도 입기 편한 진을 찾던 신세대의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서태지와아이들이 출현한 이후 가요계에서 댄스 그룹이 강세를 보이자 골반에 걸치면서 통이 넓어 춤추기 편한 힙합바지가 인기를 끌었다. 보이런던이 한때 NIX와 맞먹을 정도로 성장했던 이유도 힙합바지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몸에 착 달라붙는 시가렛 팬츠를 만들어 내는 96뉴욕이 인기 있다.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신세대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진 업체들은 독특한 영업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바로 재주문 체제이다. 재주문 체제는 다양한 제품을 출시한 후 소비자 반응이 좋은 품목만을 집중적으로 주문받아 매출을 높이는 전략이다. 그래서 각 업체는 가짓수를 20%까지 줄이면서 생산량은 잘 나가는 모델 위주로 60%까지 늘려 잡았다.

청바지 업체는 아니지만 한섬이 출시한 시스템의 성공은 NIX에 못지 않다. 세미 정장 브랜드인 시스템은 교복 자율화 세대의 패션 감각에 부합하는 제품을 선보였다. 튀는 디자인에다 치수를 작게 한 차별화 전략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다른 브랜드보다 치수가 작게 나오는 시스템 제품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하는 학생들이 생길 정도였다.

의류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업체는 역시 신세대가 주요 고객인 잡화류 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잡화류 시장에는 터주 대감이 있다. 신세대에게는 쌈지라는 제품명으로 잘 알려진 레더데코이다. 레더데코는 91년 토털 액세서리 브랜드인 쌈지를 출시하면서 신세대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의류업체가 내놓는 잡화류보다 싸면서 신세대를 겨냥해 장난스럽고 앙증맞은 디자인을 선보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쌈지가 성공하자 레더데코는 94년 여성 위주 브랜드인 아이삭을, 지난해 2월에는 남성 브랜드인 놈을 출시했다.

올해 4월 기준으로 레더데코는 직영점과 대리점을 합쳐 모두 3백11개 유통망을 갖추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이 5백50억원이고, 올해 매출 목표액은 8백억원이다.

패션 시장과 함께 신세대가 소비를 주도하는 업종이 음반산업이다. 국내 최대 음반 판매업체인 타워레코드의 강남점을 찾는 손님 대부분은 신세대이다. 타워레코드 집계에 따르면, 타워레코드 강남점을 찾는 전체 손님 가운데 10대와 20대 고객이 86%를 차지한다. 팝(54%)이 가장 많이 팔리고, 가요는 대략 25%를 차지하는데 이 역시 신세대 취향의 앨범이 많이 나간다. 패션·음악 결합한 매장에 ‘감성 세대’ 몰려

타워레코드는 원래 미국 세크라멘토에 본사를 두고 세계 1백70여개 체인망을 갖고 있는 세계 최대 음반 소매업체이다. 국내에는 95년 6월 강남점을 시작으로 명동점, 대구점, 부산점을 차례로 개점했다. 타워레코드는 주고객인 신세대 취향에 맞춰 실내를 화려하게 꾸미고 첨단 기자재를 설치했다. 강남점은 평일에 5천여 명이 출입하고, 주말에는 7천명까지 몰린다. 명동점은 신세대 패션 멀티숍인 유투존 지하 1층(66쪽 상자 기사 참조)에 있다. 패션에 민감한 신세대가 역시 대중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패션과 음반산업을 연결해 매출을 높이자는 의도가 엿보인다.

신세대를 염두에 둔 영업 전략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강남점은 유행에 민감하고 취향이 다양한 신세대의 음반 소비 성향을 맞추기 위해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대략 14만장을 매장에 내놓고 있는가 하면, 최신 앨범은 국내 어느 업체보다 빨리 들여오고 있다. 타워레코드 김은형 대리는 “신세대는 MTV 같은 위성 채널를 통해 시장 정보를 우리보다 빨리 접한다”라고 말했다. 장르도 다양하다. 갱스트랩·얼터너티브록·펑크록 같은 최신 유행 음악과 유명 가수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

메트로미도파 이재황 대리는 “신세대는 어쨌든 튀고 싶어하기 때문에, 어떻게 저런 것을 입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는 옷이 오히려 신세대에게는 인기가 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신세대를 겨냥한 사업의 성패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들의 취향을 얼마나 정확히 예측하고 이에 대응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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