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느냐 먹히느냐, 뜨거워진 기업 사냥
  • 蘇成玟 기자 ()
  • 승인 2000.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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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B네트워크·메디슨 등 적대적 매수설… 아직 ‘혐의’만 무성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기업 사냥’ 시대가 열리고 있다. 지난 5월부터 정부가 침체한 증시를 되살리고 낙후한 기업 지배 구조를 개선할 목적으로 적대적 합병·매수(M&A)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펼치자 서서히 ‘약발’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7월부터 투신사가 ‘주식형 사모 펀드’를 개설할 수 있도록 허용한 데 이어 머지 않아 ‘M&A 전용 공모 펀드’까지 허가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가 강력한 정책 의지를 천명하자 증권가에서는 합병·매수 타깃이 될 만한 기업 명단이 쏟아져 나와 주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동원증권이 KTB네트워크 주식을 집중 매집해 큰 관심을 끌었다. 동원증권은 지난해 12월부터 KTB네트워크 주식을 꾸준히 사들였으나 지난 6월 갑자기 지분율을 약 12%로 높이며 대주주로 떠올라 ‘적대적 매수’가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주변의 의혹이 증폭되자 동원증권 오너인 김재철 회장이 직접 나서서 KTB네트워크 주식을 사들인 것은 ‘투자 목적’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동원증권은 KTB네트워크 지분율이 5%를 넘었는데도 이를 금융감독원에 바로 신고하지 않아 그같은 해명을 뒷받침했다. 지분율이 5%를 넘어설 경우 이를 5일 이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5%를 초과한 주식에 대해서는 의결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거의 ‘촌극’으로 일단락될 분위기다. 하지만 KTB네트워크측은 여전히 동원측의 진의를 의심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동원증권이 주식을 매집한 이유가 단순한 투자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것이다. KTB네트워크 주식을 올해 주가 저점과 대비해 3배나 급등한 1만5천원대 가격에서 대량 매수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점, 또 KTB네트워크 지분을 5% 보유한 태영의 윤석민 상무가 동원증권 김남구 부사장과 친구 사이라는 점이 주요한 이유이다.

KTB네트워크 권오용 상무는 “(동원증권이 설명하는) 의도야 어떻든 그동안 상황을 돌아보면 경영권에 일단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해석했다. 그렇지만 한국무역협회장까지 맡고 있는 재계 원로 김재철 회장이 직접 나서서 한 말을 쉽게 번복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KTB네트워크측은 믿고 있다.

증권가도 이 사건을 단순한 촌극치고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해석이 분분하다. 심지어는 주가를 올리려고 두 회사가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냐는 근거 없는 추측까지 나돌고 있다.

다만 합병·매수 전문가들의 풀이를 종합해 보면 공통점이 도출된다. 우선 동원증권이 확보한 지분율을 가지고는 경영권을 탈취하기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동원증권이 확보할 수 있었던 의결권 지분율은 태영까지 계산에 넣어도 20%에 못 미쳤다. 반면 KTB네트워크가 확보한 의결권 지분율은 23%에 달한다.

그렇다면 동원증권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합병·매수 전문가들은 ‘밑져야 본전’ 작전일 가능성이 컸다고 본다. KTB네트워크가 계속 고수익을 내면 투자 가치가 올라가 동원이 주장하듯 ‘투자 목적’이 실현된다. 본전이라는 표현은 이 경우에 해당한다.

KTB네트워크의 경영권에 문제가 생긴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금융감독원은 KTB네트워크 권성문 사장이 1998년 미래와사람 대표로 재직할 때 ‘냉각 캔’과 관련한 허위 공시를 통해 주가를 조작했다며 지난해 10월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이 사건은 검찰에서 ‘기소 유예’로 처리되었지만, 권성문 사장에 대한 도덕성 시비는 끝나지 않고 있다.“작전 세력 차단책 시급하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KTB네트워크 경영권에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 주주인 동원증권으로서는 KTB네트워크를 ‘무혈 점령’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그런 사실이 발생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더구나 공기업을 민영화해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회사를 상대로 적대적 매수를 감행한다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권사장은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합병·매수의 귀재여서 함부로 덤빌 상대가 못된다.

동원증권은 내실 있는 경영을 해 온 것으로 정평이 있지만 사이버 금융 환경에서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또 계열사인 동원창투를 통해 고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이 역시 벤처 산업을 주도하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같은 처지에서 KTB네트워크처럼 ‘경영권에 허점이 엿보이는’ 우량 벤처 캐피탈에 군침을 삼킬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KTB네트워크 외에도 경영권을 둘러싼 적대적 매수설에 휩싸인 기업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메디슨이다. 메디슨은 시가 총액이 3천억원대인 데 비해, 자산 가치는 7천억∼1조 원대로 평가되어 증권가에서 매력적인 적대적 매수 대상 기업으로 평가된다.

적대적 매수설이 나돌자 메디슨은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예산 1백97억원을 배정했다고 공시했다. 메디슨 관계자는 “유통 물량이 천만 주인데 6월21일에 3백43만주, 6월22일에는 5백38만주로 거래량이 폭증했다. 아직 특정 세력이 있다고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대량 매입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메디슨이 주가를 끌어올리려고 적대적 매수설을 흘리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에 대해 메디슨측은 ‘그렇다면 한 달 현금 흐름이 5백억원인 회사가 자금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2백억원어치나 자사주를 사들일 이유가 있겠는가’라고 일축했다.

메디슨 적대적 매수설에 대한 합병·매수 전문가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메디슨은 사냥하기 힘든 회사’라는 것이다. “외국 기업이나 대기업은 여론 때문에, 그 외는 매수 능력 때문에 힘들다.”(제해진 SK증권 과장/M&A 담당) “1/4분기 실적이 대폭 적자를 기록한 기업인 데다 자산이 많다지만 거의 페이퍼 머니(paper money)일 뿐이어서 매력이 떨어진다.”(조효승 에이원창투 사장/전 아시아M&A 대표) “이민화 회장은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많다. 아마추어가 아니고서는 방어 능력이 충분한 회사에 덤빌 이유가 없다.”(박만규 동양정보통신M&A 대표)

전문가들이 메디슨에 대한 적대적 매수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하는데도 시장에서는 유언비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적대적 합병·매수 장려책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부분도 바로 ‘작전 세력’ 때문이다. 합병·매수는 발표되기 전에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유언비어에 춤추는 주가 속성상 합병·매수처럼 작전 세력이 이용하기에 좋은 재료도 흔치 않은 것이다.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상하한가 폭을 철폐하면 위험 부담이 커져 작전 세력도 주식을 함부로 매집할 수 없고, 일반 투자자도 쉽게 주식을 따라잡기 부담스러워져 자연스럽게 부작용이 억제될 것이다.”(제해진 과장) “허술한 시장 감시 제도부터 강화해야 한다. 거래 질서가 바로잡혀야 작전 세력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한다.”(조효승 대표)

하지만 투자 붐을 조성하기에 급급한 증권사들은 적대적 합병·매수 타깃이 될 만한 기업 명단을 발표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자산 가치가 우량하거나 주가가 저평가되었다고 판단되는 기업들을 마구잡이 식으로 거론하는 것이다.

하지만 합병·매수 전문가들은 일단 자본금이 적고 관심에서 동떨어져 있는 기업들만 ‘사냥감’ 물망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박만규 사장은 “거래소에서는 관리 종목이, 코스닥에서는 벤처 기업보다 눈에 잘 안 띄는 일반 제조업체가 적대적 매수 대상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적대적 합병·매수가 활발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올해 말이나 내년 상반기에 이르게 되면 사례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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