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상륙한 '기업사냥'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5.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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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합병·매수 본격 시동…97년부터 무섭게 늘어날 듯
지난 5년 동안 기업 합병·매수(M&A·Mergers & Acquisitions) 업무로 밥을 먹고 산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서서히 길고 긴 겨울이 물러갈 기운이 보이더니 올해는 봄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낙관론이 이들 사이에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사례는 한국에도 기업을 하나의 상품으로 사고 파는 M&A 시장이 설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보게 했기 때문이다.

동부그룹은 최근 (주)한농의 대주주간 불화를 적극 활용해 이 기업을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두 은행의 특정금전신탁을 통해 사모은 18.31%의 지분과, 매도 의사를 은밀히 전해온 정철호씨 등 정씨 일가로부터 3월9일 24.76%(4백24억원)를 사들여 동부는 43.07%의 지분을 확보한 최대 주주로 떠올랐다.

동부의 한농 인수에 대해 합병·매수 전문가들은 적대적 합병·매수가 한국 땅에 본격 상륙한 신호탄으로 평가하고 있다. 경영권을 나눠 갖고 있던 전 사장 신준식씨가 법원에 ‘이사 및 감사의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격렬히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개 매수라는 적대적 합병·매수 방식이 사실상 한국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지난해 12월 한솔제지의 동해투자금융 매수였다. 동해투금측이 웬일인지 저항하지 않아 싱겁게 끝났지만, 이 건은 다른 회사의 대주주들로 하여금 경영권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갖게 만들었다.

1월 말에 벌어진 경남에너지의 대주주 공방전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합병·매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 사례였다. (주)원진은 경남에너지의 1대 대주주였지만 2대 대주주인 (주)가원과 지분율 차이가 1.5%에 불과했다. 원진은 연탄장사에서 지난해 도시가스 허가를 받아 맛있는 떡이 된 경남에너지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공개 매수를 통해 주식 10.5%를 주당 4만9천5백원에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진의 시도는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 좌절됐다. 다급해진 가원이 ‘백기사’라는 방어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가원의 ‘백마 탄 기사’는 대웅제약이었다. 대웅제약이 8% 가까운 경남에너지 주식을 매집해 방어군의 지분율을 20%로 올려 놓았다. 주가가 5만3천원대로 오르자 원진의 공개 매수에 응한 주주는 단 한 사람, 16주에 그쳤다.

올해 들어 잇달아 발생한 이같은 사례는 합병·매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증권시장에는 수십 개 회사가 합병·매수 관련 기업으로 거론되고 있다. 합병·매수가 강력한 테마 주로 떠오르면서 대상 기업의 주가도 요동치고 있다.

한편 지난해부터 ‘자사주 펀드’ 가입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주식 대량 취득 승인 요청도 93년에는 3건이었으나 94년에는 9건에 달했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대주주들은 매수 당할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합병·매수 대상 기업 2백여 개

‘기업 복덕방’인 합병·매수 주선 기관에는 올해 부쩍 기업을 사거나 팔고 싶다는 의뢰가 밀려들고 있다. 한국종합금융의 최창선 기업금융팀장은 “80년대 말 이 업무를 시작한 뒤 올해 같은 매매 열기는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2백여 회사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가운데 30여 건은 성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합병·매수가 활성화할 가능성을 읽게 하는 또 하나의 징표는 한국M&A(주) 기업매수전략연구소와 같은 전문 회사가 출현한 것이다. 합병·매수 업무 하나로도 충분히 비즈니스가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합병·매수 전문 회사가 수천 개에 이른다. 현재 재정경제원으로부터 인가받아 이를 취급하는 주선 기관은 모든 종합금융사와 17개 증권사다.

합병·매수는 둘 이상의 기업이 결합하여 하나의 기업이 되는 합병과, 인수자가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이나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차지하는 매수를 뜻한다. 어떤 경우에도 경영권이 이전돼야 합병·매수로 볼 수 있다.

그동안 기업간 ‘결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벌 그룹의 계열사간 합병이나 80년대의 부실 기업 정리, 90년대 들어 진행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 역시 보기에 따라서는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최근 2~3년 동안 화제를 뿌린 기업 매수 건은 선경그룹의 한국이동통신, 삼성그룹의 국제증권과 한국비료, 제일은행의 일은증권, 대한주택공사의 (주)한양, 거평그룹의 대한중석, 신호그룹의 도신산업, 해태전자의 인켈, 최근 한창그룹의 나우콤 인수에 이르기까지 꽤 많다. 그러나 이같은 사례는 정치성을 띠거나 당사자간 합의에 의한 우호적 합병·매수였다. 경영권이 시장에서 사고 팔린, 서구식 개념의 순수한 합병·매수로 보기 어렵다.

‘M&A 1세대’ 로 볼 수 있는 쌍용투자증권의 한재일 M&A팀장은 한국 경제에도 합병·매수가 활성화할 여건이 성숙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산업구조 조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생명 주기로 보아 성숙기에 진입한 산업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다. 이 때는 공장을 지어 사업을 시작하는 것(그린필드 스타트 업)이 불리하다.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시간을 버는 ‘빨리빨리 전략’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골라 획득할 수도 있으며, 기술·사람·생산시설·유통망을 통째로 얻을 수도 있다. 지난해 재벌 그룹의 해외 기업 매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이런 다목적 포석 때문이었다.

백여 년 전 미국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합병·매수는 세계 거대 기업들을 만든 주역이다. 이들은 현재도 쉬지 않고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고 있다. 심지어 ‘적과의 동침’도 감행한다. 합병·매수가 기업의 목적 달성을 빠르게 하는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경영 기법인 것은 틀림없다. 94년 세계 기업들의 합병·매수 건수는 93년 대비 20% 늘어난 5천85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액으로도 2천3백90억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숫자다.

한국에서 합병·매수 활성화 가능성을 점쳐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증권거래법 200조의 폐지다. ‘10% 룰’이라 불리는 200조는 상장 주식의 대량 취득을 금하는 조항이다. 일반 투자자들은 상장사 주식을 10% 이상 살 수 없고, 상장 당시 10% 이상 갖고 있던 주주도 이 비율을 넘길 수 없다. 정부가 민간 회사의 경영권을 보호해 온 것이다. 이 규정은 지난해 이미 ‘지분율 10% 이상 주주의 소유 한도 및 일반 투자자의 투자 한도를 폐지한다’로 개정되었으나 발효 시기를 97년 1월1일로 늦춰 놓았다. 97년이 되면 주식시장에서 특정 회사 주식을 10% 이상 사들일 수 있다. 물론 5%가 넘어설 때부터 매집자는 목적이 단순 투자용인지 경영권 획득에 있는지를 밝혀야 하지만, 특정 기업을 탈취하는 데 따른 제약은 없어진다. 현재는 주주를 상대로 장외 시장에서 공개 매수를 시도하거나 합의에 의한 합병·매수를 할 수 있다.
‘머니 게임’으로 변질할 가능성 적어

합병·매수는 기본적으로 무능력한 경영자에게서 유능한 새 주인으로 경영권이 이전되는 것이다. 이같은 기업 경영의 효율성 도모는 부가가치를 창출해 국부를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합병·매수는 80년대 말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그 당시 경영에는 관심이 없는 기업 사냥꾼이 잘 꾸려나가고 있는 기업을 사들여 마치 피자처럼 쪼개 팔아 공중 분해시키는 폐해가 극에 달했다. 한국에서는 금지돼 있지만, 주선 기관들이 자기 돈으로 ‘못생긴’ 기업을 사들여 예쁘게 화장한 뒤 비싸게 되파는 일도 흔했다. 머니 게임의 양상으로 치달으면 합병·매수의 긍정적 측면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한국M&A(주) 권성문 부사장은 “97년이 되면 합병·매수가 상당히 활발해지겠지만 머니 게임으로 변질될 공산은 매우 적다”고 말한다. 우선 미국의 정크본드(부실 채권)와 LBO(합병 대상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꾸는 것)처럼 대량으로 돈을 만들 수 있는 금융 상품이 한국에는 없다. 98가지 죄목으로 미국 연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복역중인 마이클 밀컨이 정크본드를 새 상품으로 개발하지 않았다면 미국에서도 초대형 합병·매수는 가능하지 않았다. 또 재벌 기업은 맛있는 기업을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나 사회적 저항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유 분산이 잘된 기업으로 꼽히는 기아자동차에 대한 93년 삼성그룹의 주식 매집이 실패로 끝난 것은 여론이 기아 편이었기 때문이다.

합병·매수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기업의 속성상 한국에도 무섭게 늘어날 것이다. 정부도 무분별한 적대적 합병·매수에 대해서는 다소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지만 적극 허용하기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 기업의 국내 기업 합병·매수도 본격화할 것이다. 시장이 개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쌍용투자증권 한재일 팀장은 “합병·매수의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면 공격측과 방어측이 모두 공정한 게임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병·매수에 대한 관심이 놀라울 정도로 커지고 있지만 제도적 환경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금세기 마지막이자 최대의 비즈니스’라는 합병·매수는 한국 땅에서도 곧 용트림을 시작할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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