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시장에서 불붙은 ‘경제 한·일전’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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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들, 삼성·LG 등에 대반격 개시…투자 전략도 180° 바꿔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소니 회장은 삼성전자의 성공담이 언론에 나올 때마다 심기가 불편하다. 삼성전자가 실적과 시장점유율에서 소니를 앞섰다는 식으로 지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니코리아 최고경영진이 국내 출입기자들에게 ‘소니와 삼성전자는 사업 영역이 다르므로 비교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44조원을 올려 소니(매출 75조원)에 뒤지지만 영업이익은 7조2천억원으로 소니의 9천9백억원을 압도한다. 세계 언론은 삼성전자가 전자 업계의 맹주 소니보다 7배나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에 놀란다. 더욱이 지난해 가전 시장에서 소니를 제친 마쓰시타의 영업이익(1조8천억원)을 합쳐도 삼성전자에 크게 뒤진다.

일본이 휩쓸고 지나간 시장에 뒤늦게 진입해 ‘이삭’을 줍던 한국 기업의 이미지는 이제 옛말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시장을 선점했던 일본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일부 업종에서는 앞서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보다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아 가격 경쟁력에서 유리하다는 분석이 다수이지만, 휴대전화 단말기나 디지털 가전 가격은 국산이 일본 제품보다 높다. 일부 시장에서 상용화 기술, 시장접근 전략, 브랜드 마케팅에서 일본 업체들을 앞서 있다.

한국 업체들의 도약은 비단 전자 업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기아 자동차는 2000년부터 판매와 생산대수에서 일본 혼다와 닛산을 제쳤다. 현대·기아차가 몇해 전 세계 5위권 안에 들겠다는 비전(글로벌 톱5)을 선언했을 때 세계 자동차 업계는 웃었다. 하지만 지난해 판매와 생산량이 각각 3백만을 넘어서며 세계 7위 자리를 확고히 하자 현대·기아차의 ‘글로벌 톱5’ 목표를 비웃던 경쟁 업체 경영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라는 ‘거물’이 버티고 있어 한국 자동차산업이 일본과 정면 승부를 벌이기는 아직 어렵다. 도요타는 미국 ‘빅3’과 유럽 자동차 업체들을 시장 경쟁에서 패퇴시킬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어 현대·기아차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혼다와 닛산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혼다와 닛산이 차지했던 시장을 잠식하며 눈에 띄게 판매를 늘리고 있다.

더욱이 미국 자동차 시장조사기관인 ‘JD파워스’가 실시한 2004년 상반기 미국 고객 신차품질조사에서는 도요타까지 제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또 모든 브랜드를 종합한 회사별 평가에서도 현대차는 혼다와 함께 2위를 차지했다. 미국 언론은 ‘사람이 개를 물었다’ ‘지구는 평평하다’는 표현을 써가며 현대차의 약진을 대서 특필했다.
뒤늦게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 업체들은 첨단 시장까지 위협하는 한국 업체들을 상대로 잇달아 선전 포고를 하고 있다. 일본 업체들이 ‘타도 한국’을 내세우며 제1의 공격 대상으로 삼은 기업은 삼성전자. 삼성전자는 진출하는 시장마다 일본 업체들을 초토화하며 세계 정보 기술(IT) 시장 2위까지 성장한 것이다. 일본의 선발대는 액정표시장치(LCD) 업체. 일본 업체 27곳은 정부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차세대 LCD 컨소시엄을 결성하고 LCD 시장 1위 삼성전자를 정조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LCD 시장에서 5조6천억원 매출을 올려 LG필립스LCD와 일본 샤프를 근소하게 앞서고 있다.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서는 소니가 에릭슨과 손잡고 카메라폰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가전 시장에서 소니를 제친 마쓰시타는 본격적으로 ‘타도 삼성’ 기치를 내걸었다. D램 반도체에 이어 메모리 반도체 주력으로 떠오른 플래시 메모리 부문도 도시바가 경쟁 제품인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HDD)를 내놓으며 삼성전자와 겨루고 있다.

LG필립스LCD도 삼성전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계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LG전자와 네덜란드 필립스가 합작한 이 회사는 LCD 텔레비전 생산에 적합한 대형 디스플레이를 생산하기 위해 일본 샤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6세대 생산 라인을 갖추고 지난 5월 시험 생산에 들어갔다. 6세대 TFT-LCD는 가로·세로 1,500×1,850mm로 LCD 텔레비전처럼 대형 디스플레이 생산에 적합한 첨단 제품이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LG필립스LCD는 지난해 10인치 이상 대형 TFT-LCD 시장에서 연간 매출 51억2천만 달러로 세계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는 48억8천만 달러로 2위를 기록해 사상 처음 시장 1위를 내주었다. 삼성전자는 LG필립스LCD와 샤프의 6세대 라인을 감안해 6세대를 건너뛰고 7세대 생산 라인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1위를 뺏겨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삼성전자가 도박에 가까운 모험을 벌인 셈이다. 7인치 TFT-LCD는 가로·세로 1,870×2,200mm로 패널 크기가 2m가 넘는 초대형 디스플레이이다.

국내 TFT-LCD 업체들이 지난해 거둔 총매출은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10인치 이하 소형 시장에 주력하는 샤프를 제외하면 세계 TFT-LCD 시장은 한국 업체들이 이끌고 있는 셈이다. 소니는 지난해 10월 독자 노선을 포기하고 삼성전자와 함께 7세대 TFT-LCD를 생산하는 합작법인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니가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타협을 거부하던 소니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변신이었다.

일본 업체의 변신은 소니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섭게 덤비는 한국 기업들과 경쟁하려면 기존 전략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김창현 LG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본 기업의 변신이 가장 잘 감지되는 분야는 투자 전략이다”라고 말했다. 일본 전자업체들은 과거 생산 규모를 늘리기 위해 경쟁하지 않았다. 시장 변화에 따라 수익성이 크게 악화할 수 있고 투자 회수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시장이 충분히 커졌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설비 투자에 나섰다. 하지만 이제 이 전략을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 업체들은 최근 LCD·2차 전지·반도체 분야에서 무모하리만큼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에 시장 1위를 자리를 빼앗긴 샤프가 세계 최초로 6세대 생산 라인을 세우는가 하면, 2차 전지 시장 1위 업체인 산요도 생산 규모를 30%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산요의 몸집 불리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차 전지 4위 업체인 GS멜코택을 인수하고 2005년까지 월 1천8백만 셀을 추가 생산해 월 6천만 셀을 출하하는 체제로 생산 규모를 늘려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LG화학과 삼성SDI의 추격을 따돌리는 것이다. 지난해 초까지 별 움직임이 없던 LG화학과 삼성SDI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올해 말 각각 세계 3, 4위로 치고 올라갈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산요는 공급 초과로 인한 수익성 악화까지 감내하겠다는 각오이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이 성장하면 새 사업으로 옮겨가던 경쟁 회피 전략을 포기한 것이다. 악착같이 덤벼들어 선점 업체들을 패퇴시키고 최후 승자가 되는 한국 기업들과 ‘한번 끝까지 해보자’는 것이다.

산요는 최근 허치슨에 공급하는 3세대 단말기 수주 경쟁에서도 LG전자와 끝까지 경쟁했다. 산요는 또 세계 1위 휴대전화 단말기 업체인 핀란드의 노키아를 위한 전용 라인을 갖추었다. 전세계 노키아 업체들이 요구하는 일일 납기를 맞출 수 있는 생산 체제를 갖추고 밀착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고객 요구에 부응해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는 한국 기업들의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일본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업계는 대규모 구조 조정을 벌이고 있다. LG전자와 삼성SDI가 지난해부터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이자 일본 정부와 업계는 한국 경계 경보를 발령했다. 후지쓰와 히다치가 합작해 FHP를 세웠고, 파이오니어가 지난 2월 NEC의 PDP 사업을 인수했다. 한국 업체와 맞서기 위해서는 1~2개 대형 업체 위주로 산업을 재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의 5개 PDP업체는 공동 출자해 ‘차세대 PDP 개발 센터’를 만들었다. 이 센터 사업비 절반은 일본 정부가 부담하고 있다. 또 샤프·도시바·마쓰시타전기도 정부 지원을 받으며 차세대 LCD개발센터를 설립했다.
일본 업체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원천 기술과 브랜드 신뢰도다. 한국 업체들은 아직까지 기술, 핵심 부품, 첨단 설비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 9대 전자업체들이 올해 연구 개발(R&D) 비용으로 책정한 액수는 32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다. 또 설비투자액은 16.5% 늘어나 25조원에 이른다. 연구 개발 비용이 턱없이 낮고 설비 투자가 뒷걸음치는 한국 업체들에게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업체들의 반격은 벌써부터 ‘전과’를 올리고 있다. 일본 업체들은 지난해 카메라폰 시장점유율 60%를 차지하며 한국 업체들(14%)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디지털 카메라 시장 1~4위(소니, 캐논·니콘·올림푸스)도 모두 일본 업체다. 차세대 성장 산업에서 주도권을 확보한 일본 기업들은 한국이 절대 우위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NEC와 히타치가 합작한 엘피다 메모리는 1/4분기 첫 흑자를 냈고 300mm웨이퍼 공장을 본격 가동해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또 후지쓰·도시바·NEC도 반도체에 수조원을 쏟아 붓고 있다.

삼성전자는 일본 업체들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경계하고 있지만 핵심 기술인 집적도와 제품 개발 주기에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어 아직 여유가 있다. 반도체 시장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기술과 시장 지배력에서 워낙 앞서고 있고 반도체 업종 특성상 일단 처진 상태에서 다시 따라붙기는 어렵다”라고 판단한다.

최근 한·일 경제 전쟁에 새 변수로 등장한 나라가 중국이다. 기술 수준과 상품 개발력에서 뒤지지만 성장 잠재력이 워낙 커 2~3년 안에 한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고부가가치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로 전락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일 경제 전쟁에서는 뒤로 물러설 곳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발짝 물러서면 바로 낭떠러지다. 원천 기술과 핵심 부품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본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틀림없다. 한국 업체들에게는 배수의 진을 치고 도전하는 투지가 늘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경험론이 유일한 버팀목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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