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력산업 ③조선 "2000년까지 순항"
  • 경남 거제·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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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신인도 하락해 수주량 줄었지만 잔량 넉넉…“시설·설계 능력 일본 앞서 2010년 1위 탈환”
신년 벽두의 충격이었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1천2백만총t(GT)대를 수주하며 일본과의 격차를 25만t 수준으로 좁혔던 한국 조선산업의 선두를 향한 질주가, 98년 1월 수주량 ‘제로’라는 벽 앞에 멈춰선 것이다. 월별 수주량이 제로를 기록한 것은 한국 조선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이 기간에 일본은 지난해보다 64%나 수주량이 증가했다).

4월 들어 수주량이 호전되고 있기는 하나 수주량 급감의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올해 1분기 수주량은 일본에 비해 36%이다. 그러나 정작 이보다 더 큰 걱정은 다른 데에 있다. 국가 신인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한국에 외국 선주들이 까다로운 계약 조건을 계속 내걸고 있는 것이다.

지금 조선업계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은행의 환급 보증(Refund Guarantee) 문제이다. 선수금을 낸 선주들이 선박 건조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 대비해 국내 금융기관말고 외국계 은행들의 추가 보증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이다. 현재는 수출입은행에서만 외국 선주들에 대해 환급 보증을 해주고 있을 뿐 국내 은행들의 환급 보증이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환급 보증 문제는 국내 업체들이 국제 입찰에 참여하는 데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일본 뒤쫓으며 중국에 쫓기는 형세

국가 신인도 하락에 따른 불이익은 이것만이 아니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로 들어서면서 계약 조건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른바 헤비 테일(Heavy Tail) 현상. 말 그대로 수주 협상에서 착수금이나 중도금보다 선박 인도 후 받는 잔금의 비중이 월등히 높아진 것이다.

선박을 발주하는 선주들이 계약 후 총액의 20∼30%를 착수금으로 주고, 공사 진척 상황에 따라 잔금을 몇 단계로 나누어 치르는 것이 조선업계의 관행이다. 그런데 요즘 선주들은 완성된 선박을 인수하고 난 다음 30% 착수금을 제외한 잔금을 한꺼번에 지불하겠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 조선업계 처지에서 수주를 마다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자연히 자금력이 부족한 조선업체들은 수주 후 2년 안팎의 건조 기간을 버티기까지 고역을 치러야만 한다.

그러나 중기 전망이 필요한 조선산업의 특성상 전문가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 조선업 기상도를 여전히 ‘맑음’으로 보고 있다. 대형 선박 한 척을 건조하는 데 드는 기간이 2년 안팎임을 감안하면 이 예상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조선업계의 선행 지표를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수주 잔량인데, 현재 조선업계의 수주 잔량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3백5척에 1천8백여만t. 5대 조선소의 선박 건조 능력이 9백70만t 정도니까 앞으로 약 2년 정도의 일감을 확보한 셈이다.

그런 만큼 현장의 분위기도 낙관적이다. 대우중공업 옥포조선소 송민호 전무는 “그리스 선주들이 일본에서 등을 돌리고 한국에 관심을 보여오는 등 수주 여건이 좋아지고 있다. 신규 설비 투자를 자제하고 설비 가동률을 극대화하는 데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우는 올해 들어 현재까지 9억5천만달러를 수주하는 등 순항하면서, 올해 초 조선업계에 드리웠던 수주 부진이라는 불안감을 떨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올해 목표액인 25억달러 수주도 무난하게 달성하리라고 보는 분위기이다.

지난해 2조2천4백억원 매출을 올리고 올해 21억달러 수주 목표를 세운 삼성중공업의 한 관계자도 “현재까지의 수주량으로만 따지면 지난해와 비교해 54% 수준이지만, 국가 신인도 하락에 따라 선주들이 선수금에 대해 환급 보증을 요구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인 것을 감안하면 꾸준한 회복세라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세계 조선산업의 최대 관심사는 한국과 일본이 벌이는 1~2위 쟁탈전이다. 중국의 확장 전략도 주목할 대상이다. 중국은 이미 95년부터 다롄(大連)에서 초대형 유조선(VLCC)을 건조하는 시설을 가동해 왔고, 상하이에도 2000년 완공을 목표로 또 다른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한 ·일 대결 구도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 변수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93년 수주량에서 일본을 추월했던 한국 조선산업은 언제쯤 그 날의 영광을 되찾을 것인가. 산업연구원 홍성인 책임연구원은 오는 2010년쯤 일본 추월이 가능하리라고 내다보았다. 이미 선박 건조용 도크를 대량 증설해 놓은데다 기술 개발 투자를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쯤이 이들 설비와 기술이 최대 효율성을 나타내는 시기라는 전망이다. 현재 세계 시장 점유율이 30% 안팎이지만 이 무렵이면 35∼40%로 늘어나 일본을 따라잡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현장의 분위기는 더욱 희망적이다. “일본에 비해 설계 능력 등에서 이미 우리가 앞선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일본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다.” 대우중공업 송민호 전무는 자신감이 넘친다.
고부가가치 선박·해상 구조물에 눈돌려야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따라붙는다. 현재의 호황기를 이용해 적절한 구조 조정을 성공리에 끝마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런 점도 있다. 경제난 이후 일손을 놓다시피 한 다른 산업과 달리 일감이 남아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산업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조선산업이야말로 중·장기 전망이 성패를 좌우하는 분야이다. 선박을 수주했다고 해도 이를 건조해 선주에게 인도하기까지는 2년 정도가 걸리는 데다 선박의 내구 연한에 맞추어 경기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70년대 초반 오일 쇼크 이후 최고조에 달했던 세계 조선 경기가 오는 2005년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상한가를 기록하리라는 기대도 있다. 당시 건조되었던 선박 수백 척이 대체되는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호황이 무한정 계속되리라고 내다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본은, 세계의 선박 건조 능력이 2000년에 3천2백만∼3천4백만t에 이를 전망이지만, 수요는 2천만t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상치를 내놓은 바 있다. 이런 공급 과잉 상태가 계속된다면 기술력이나 가격 경쟁력에서 뒤지는 나라는 도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선 협정이 체결되면 저가 수주를 국제기구에 제소할 길도 열리게 된다. 가격 경쟁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국내 전문가들이 컨테이너선이나 벌크선 일변도 전략을 버리고, 고부가가치 선박이나 각종 해양 플랜트 사업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일본은 해상 헬리포트 등 메가 프로트(초대형 해상 구조물) 쪽에 집중 투자하는 것은 물론 무인 선박·연료 절감형 엔진 등 차세대 기술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산업연구원 홍성인 책임연구원은 “2020년 이후에는 재래식 선박 수요가 초고속 호화 여객선은 물론 해양 광물 채취 장비 등 다양한 해상 구조물로 대체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그런 면에서 미래 지향적 기술을 개발해 신규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는 현재 호황을 누리고 있는 한국 조선산업에도 예외 없이 적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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