땜질 처방으로 ‘신용 위기’ 불 끌까
  • 蘇成玟 기자 ()
  • 승인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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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회사채 매입, 기업 자금난 ‘숨통’… 근본 대책 뒤따라야
자금난으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기업들이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국민·주택 등 12개 시중 은행장들은 6월2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조찬 모임을 갖고 회사채를 적극 매입하기로 합의했다. 또 회사채 매입에 필요한 채권 펀드를 조성하는 데 쓸 자금을 6월 말까지 마련하기로 결의했다.

속속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상환 기간을 연장하지 못해 애태우던 기업들로서는 한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하지만 기업 자금난이 일단락된 것은 아니다. 정부가 시중 은행들에 요청한 채권 펀드 규모는 10조원. 그에 비해 7월에만 5조5천억 원, 연말까지 30조원에 육박하는 회사채가 만기를 맞게 될 판이다. 내년 말까지 상환 기간이 잡혀 있는 회사채는 약 95조원에 달한다.

이번 1행장들의 합의는 정부가 개입해 이끌어낸 것이지만, 기업 자금난이 일촉즉발에까지 이른 상황이어서 그 절박성이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금융 전문가들은 효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이번 합의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보여온 자세를 감안할 때 위기를 근본적으로 타개할 후속 대책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 김상조 교수(한성대·경영학)는 “현 금융 위기의 본질이 일시적 유동성 문제가 아니라 기업들의 신용 위험에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은행장들의 합의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후속책이 따르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위기가 재연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 시중 은행 고위 관계자는 당장 야기될지 모를 문제점부터 지적했다. 시중 은행들이 합의를 번복하기는 힘들지만, 문제는 제2 금융권의 대응이라는 것이다. “은행들만 합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자금 부족에 허덕이는 투신·종금 등 제2 금융권이 회사채 차환을 거부하거나 기업 어음(CP)을 돌려버리면 또 은행만 덤터기를 쓰게 된다.”

정부가 어떤 대안을 내놓아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요즘 금융 시장의 실상이다. 정부는 당면한 위기 상황을, 늘 시중 자금은 풍부한데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마비된 데서 말미암은 것처럼 풀이해 왔다. 기본 시각이 그렇기 때문에 △은행 초단기 신탁 허용 △회사채 상환 부분 보증 △회사채 전용 펀드 신설 등 금융 시장 안정책 역시 유동성을 강화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어 올 수밖에 없었다.

자금난 본질은 ‘유동성 위기’ 아닌 ‘신용 위기’

그러나 대다수 금융 전문가들은 정부가 대안을 제시할 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어 왔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에 비유된다고나 할까. 정부의 금융 시장 안정책이 늘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는 미봉책으로만 일관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부가 주도한 은행장들 합의를 놓고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기업 자금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현 사태의 본질이 기업에 대한 ‘크레디트 리스크(credit risk;신용 위기)’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들이 각자 짊어진 채무를 갚을 능력이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신용 경색 현상인 것이다.

조흥은행 이건호 리스크관리본부장은 “크레디트 리스크는 기업이 경기 변동에 상관없이 장기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부채를 안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된다. 뜬소문 때문에 과장된 경우도 있지만 국내 기업들은 이 리스크가 큰 편이다”라고 지적했다. 당장 망할 기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구든 먼저 자금을 빼내기 시작하면 망할 수 있다’는 식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물론 기업들의 생각은 다르다. 자금난에 내몰렸다고 지목되는 기업들은 하나같이 ‘영업 이익으로 현금이 창출되고 있는 데다 자산 매각·외자 유치 같은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어 시간만 주어지면 해결될 문제다’라고 응답한다.
하지만 자금위기설에 휩싸인 대기업들을 접촉해 본 결과, 자금 운용 내역을 자신있게 밝히는 기업은 얼마 되지 않았다. 효성 자금부 김충훈 이사는 “언론이 ㅎ기업이라고 거론하는 바람에 우리도 의심을 받아 왔다. 하지만 우리는 6월5일 BBB 회사채 신용 등급 수준에서 가장 낮은 0.9% 가산 금리만으로 회사채를 발행할 정도로 자금 운용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장담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실제 상황보다 소문이 부풀려진 기업들도 있지만 몇몇 대기업은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으로 관측된다.

기업의 단기 유동성은 크게 △만기 회사채 비율 △기업 어음 발행 비율 △당좌 대월 한도 소진율로 파악된다. 금융권에 따르면, 속속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도표 참조)도 문제이지만 현재 6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기업 어음 물량이 더 큰 부담을 주고 있는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당좌 대월 한도 소진율의 경우 업계 평균이 20%대인 데 비해 90%에 육박하는 기업마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의 자금난이 기업들 주장처럼 유동성 문제라면 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유동성 위기란 기업들이 채무 상환 능력이 충분한데도 현금 흐름에 일시적 문제가 생겨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해 대우 사태 이후 1년여 동안 투신·종금 쪽에서 유출된 자금이 100조원 넘게 몰려 요즘 은행 금고는 차고 넘친다. 현금 흐름이 양호한 기업에는 은행이 돈을 못 빌려주어 안달하는 현실이다.

“마지막 기회 놓치면 금융 위기 재발할 판”

지난해 전년 대비 3배가 넘는 순이익 증가율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최대 호황을 기록한 비메모리 반도체 제조 업체 KEC(전 한국전자) 곽윤영 기획부장은 “자금난이 계속될지 몰라 유동성을 확보해 두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현금을 마련해 이를 금융권에 맡겼다가는 예전과 달리 역마진이 발생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요즘 은행에 가보면 전례 없이 우량 기업과 불량 기업 간에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반도체·전자·통신·석유화학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이후 기업들의 순이익 증가 폭은 채무를 감당하기에 여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기업들은 차입 경영 구조 때문에 금융 시스템이 ‘삐끗할’ 경우 언제든지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기업들에게 부채 비율을 200% 아래로 낮추라고 종용해 왔다. 기업들의 무리한 차입 경영이 1997년 외환 위기를 낳은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비싼 이자로 자금을 빌려 비효율적 투자를 계속하다 보니 제품 경쟁력이 떨어져 무역 수지가 악화하고 외화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부는 당장 시장에 가해질 충격을 피하려고 한계 기업들을 워크아웃시켰고, 부실 은행에 공적 자금을 쏟아부어 수명을 늘려 주었다. 1999년 대우 사태가 터지자 금융권, 특히 제2 금융권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져 갔다. 하지만 정부는 부실 자산 내역을 정확히 밝히고 수술을 단행하는 대신 ‘더 이상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시간만 끌어 왔다.

김상조 교수는 정부가 당초 계획대로 채권 시가 평가제를 전면 실시해 제2 금융권의 부실 자산 규모부터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권을 장부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해야 기업의 신용도가 정확히 반영되고, 그래야 비로소 정부가 아닌 시장이 기업을 평가하는 주체가 되어 신뢰도 회복되는 것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이미 자생력을 상실한 투신사나 종금사는 빨리 퇴출시켜야 한다. 외국계든 한국계든 우량한 금융기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 시장이 의외로 빨리 안정될 수도 있다”라고 진단했다.

지난 4월 현대의 자금난에서 촉발해 5월부터 새한 워크아웃과 나라·영남·한국·중앙으로 이어지는 종금사 사태로 불거진 금융 시장 혼란이 정부의 애매한 개혁 정책에서 말미암았다는 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개혁 원칙이 실종된 데에는 정책 담당자들과 아울러 그들을 흔들어 온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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