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그룹의 ‘삼성 따라하기’
  • 신호철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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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반도체 사업으로 중심 이동…지분 편법 상속도 닮은꼴



효빈(效頻)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미인을 닮으려고 애쓰던 동네 처녀가, 미인의 찡그린 표정까지 따라 하다가 낭패를 본다는 뜻이다. 재계 14위 동부그룹이 그런 경우다. 반도체 사업과 금융 사업을 주력으로 삼으면서 삼성의 성공 전략을 배우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전철까지 함께 밟고 있다.



지난 8월23일 동부그룹은 아남반도체 인수를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2일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와의 공급 협상이 결렬되면서 아남반도체 인수가 물 건너갔다는 보도가 나온 지 하루 만의 일이었다. TI와의 계약 성공은 아남반도체 인수의 전제 조건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을 차세대 핵심 사업으로 삼고 있는 동부그룹은 이런 저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아남반도체 인수를 포기하지 않을 방침이다.



업계에서 동부그룹의 확장 전략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아남반도체 인수를 위해 금융 계열사 자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7월 초 동부그룹은 아남반도체 증자에 참여해 동부화재가 8.1%(5백억원), 동부생명이 1.6%(100억원) 지분을 확보했다.



원래 금융 계열사가 보유한 계열사 지분의 의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법이 있었다. 예금주들의 돈이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에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2001년 12월 재계의 끈질긴 로비 끝에 의결권제한제도는 폐지되었다.


참여연대 김상조 교수(한성대)는 “지난해 법 개정 논란이 한창일 때 출자 총액 제한 완화 문제에만 논란이 집중되다 보니 금융 계열사 의결권 제한 문제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김주영 변호사는 “출자 총액 완화와 함께 현정부 재벌 정책이 후퇴한 대표적인 개악 사례다”라고 말한다. 동부그룹이 아남반도체를 인수하게 되면, 법 개정 혜택을 받아 계열사를 가지는 첫 번째 재벌이 된다.



동부그룹의 옛날 재벌 닮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순환 출자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동부그룹에 5천1백억원을 대출(신디케이트론)해 주면서 그 조건으로 2002년 12월31일까지 5백억원 신규 증자를 내걸었다. 현재 동부전자로서는 국내에서 신규 증자를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아남반도체를 증자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할 계획이다. 동부화재가 5백억원을 아남반도체에 지원하는데, 공교롭게도 아남반도체는 5백억원을 동부전자에 유상 증자 형태로 지원한다. 그룹 차원의 자금이 아남반도체를 통해 동부전자로 우회 지원되는 것이다. 동부그룹 최진호 팀장은 “아남반도체는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합병으로 한 기업이 될 회사들이다”라고 답했다.






산업은행이 ‘수호 천사’ 노릇



물론 동부그룹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파운드리(비메모리 수탁가공) 반도체 사업은 의미 없는 투자가 아니다. 산업은행 기업금융실 최용균 부부장은 “한국은 파운드리 사업을 하기 가장 좋은 나라다. 지금 투자하면 현재 파운드리 1위 국가인 타이완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다른 전문가들도 과거 메모리 반도체가 효자 노릇을 했듯이 파운드리가 국내 경제 발전의 엔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좋은 사업 취지와 달리 사업 과정은 깔끔하지 못했다.



산업은행은 11개 은행이 참여한 신디케이트론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동부그룹 파운드리 사업의 든든한 수호천사 역할을 하고 있다. ‘외자 유치 후 대출’이라는 신디케이트론의 조건도 올해 6월 ‘대출 후 외자 유치’로 바뀌었다. 국민은행은 이 조건 변경에 완강히 반대했지만 산업은행의 설득으로 결국 합의했다는 후문이다. 이 과정에서 동부전자 고위 임원들이 산업은행 출신 인사라는 사실이 드러나 구설에 올랐다. 산업은행은 “수십년 전 퇴직한 사람들이어서 현 경영진에 영향을 줄 사람이 없다. 일반 은행이 꺼리는 기업 대출에 국책 은행이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한다.



동부그룹은 한국의 재벌답게 ‘아들에게 편법으로 지분 상속하기’에도 능력을 보였다. 김준기 동부 회장의 편법 상속은 삼성 이재용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훨씬 노골적이다. 신주인수권이나 전환사채를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1995년 장남 남호씨가 김회장으로부터 한국자동차보험 주식 52만주를 증여받자마자 이 주식은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남호씨는 17만2천주를 4배나 높은 가격에 팔았다. 단 넉 달 만에 20억원 가까이를 번 것이다. 이런 식의 증여와 투자·매각은 다른 계열사에서도 벌어졌다. 올해에도 김남호씨는 동부화재 주식을 팔아 현금 67억원을 손에 넣었다. 항상 주가가 떨어질 때 장외에서 사서, 주가가 최고로 올랐을 때 팔았다.



지난 6월20일 김남호씨와 김주원씨(차남)가 동부화재 지분을 매입하면서 두 아들의 지분이 회장 지분보다 많아졌다. 동부화재는 동부그룹의 금융 부문 실질적 지주회사다. 남호씨는 다른 계열사에서도 2대 주주로 올라 있다. 경영권 승계를 논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분 이동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자녀들이 낸 증여세는 100억원(1995년 증여받은 2백20억원 관련) 정도로 알려져 있다.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의 나이는 57세다. 김준기 회장은 1969년 외할아버지에게서 받은 2천5백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김진만씨는 삼척산업을 경영한 기업가이자 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치가였다. 김준기 회장은 아버지 도움 없이 회사를 성장시켰다는 자부심을 곧잘 표현하곤 했는데, 그 자부심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지는 않았다.



김준기 회장의 동생은 민주당 김택기 국회의원이다. 김의원은 1994년 동부가 인수한 한국자동차보험 사장을 맡아 일하다가 ‘국회노동위원회 돈봉투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1995년 광복절 때 특별사면을 받았다.
지난 1월 동부그룹은 본사를 테헤란로 빌딩으로 옮겼다. 동부그룹이 추진하는 3대 차세대 사업은 금융·바이오(화학)·반도체다. 금융 사업에 대한 의지는 서울은행 인수 때 보인 바 있다. 당시 동부그룹은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인수하려 했다. 하지만 당초 서울은행 인수에 관심이 없던 하나은행이 올해 서울은행 인수전에 나서자 포기했다.



동부그룹의 한 관계자는 동부화재가 아남반도체에 투자한 것이 동부전자에 대한 우회 지원이 아니냐고 묻자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의 대주주인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반문했다. 삼성 따라 하기도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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