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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마감한 ‘커밍아웃’

어느 10대 동성애자의 자살/“사는 것이 살얼음판 걷는 꼴” 유서 남겨

차형석 기자 ㅣ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3.05.15(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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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안에는 유서·일기장과 영정에 쓸 사진이 들어 있었다. 유품으로 보아 그는 진작 죽음을 결심한 듯했다. 다섯 장짜리 유서에는 ‘동성애자로 태어난 걸 후회하기도 했고, 이 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고 쓰여 있었다. 사무실 바닥에는 그가 마신 소주 2병과 눈물을 닦은 듯한 휴지 조각이 널려 있었다. 시신 옆에는 자신의 전재산이라며 34만원을 넣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시조시인이 꿈이었던 10대 동성애자 ㅇ군(19)은 지난 4월26일 서울 휘경동에 자리한 ‘동성애자 인권 연대’(동인련) 사무실에서 이렇게 스스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ㅇ군의 자살은 그를 아는 다른 동성애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그가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적극 펼쳐왔기 때문이다. 2002년 겨울, ㅇ군은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보태 달라며 편지와 1만5천원을 보내면서 동인련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 3월부터는 이 단체에서 상근했다. 그는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반전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4월에는 일간지 두 곳에 자신을 드러내고 동성애자 인권 문제와 전쟁 반대에 관한 독자 투고를 하기도 했다.

육우당(六友堂)·미동(美童)·설헌. ㅇ군이 온라인에서 사용하던 별명들이다. ‘육우당’은 그가 거의 매일 사용하다시피 했던 물건 여섯 가지를 말한다(묵주 파우더 녹차 술 담배 수면제). ‘미동’은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서 여자 역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설헌’은 그가 좋아했던 ‘허난설헌’을 줄인 별명이다. 그가 동성애자 동호회에 남긴 글들에는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야 하는 한 10대의 고민과 절망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ㅇ군이 스스로 ‘이반’(동성애자)임을 자각한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부터였던 것 같다. 묵주를 가장 좋아할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더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성적 지향 때문에 학교 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ㅇ군이 남긴 글을 보면 이 무렵 반 친구들을 기피하고, 단체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성애자 정기모임 동료들과) 고깃집에 갔는데 거기서 같은 반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있어서… 그걸 본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다행히도 그 애들은 내가 이반인 걸 몰랐다. 휴…. 근데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1시간 동안 울었다.’(2002년 11월17일) ‘2001년, 학교 친구를 좋아했다. 내가 게이인 걸 안 후부터 태도가 180도로 확 변했었던 적이 있다.’(2003년 1월23일) 주변 사람에 따르면, 그는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ㅇ군이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잦아지자 부모는 그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다. 그는 1∼2주일에 한 번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다가 끝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2003년 1월, ㅇ군은 경제적 독립을 시도했다. 게이바(동성애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점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본인 스스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심란해 했지만, 같은 처지인 동성애자를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은 게이바가 유일했다. 게다가 고등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사회 초년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시조는 그에게는 탈출구였다.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을 때 그는 시조를 썼다. 지난 2월 한 시조시인회에 학생 시인 자격으로 가입했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 동호회는 동인들이 합의해야 신입 회원을 받는 등 가입 조건이 까다로웠다. 그는 2년 동안 습작을 하고 꾸준히 시조를 투고했다.
시조에서 만큼은 그는 자기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시조를 시조 동호회 게시판에 올렸다. 주변 사람에게도 시조를 읽어주었다. 그러나 애착만큼이나 실망도 컸다. 그가 쓴 시조에 대해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평이 나오자 그는 크게 좌절했다.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는 좋은 시조시인이라고 평가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성애주의와 금욕주의와 도덕주의를 지향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이단자나 일탈자에 불과하니까.’(2003년 4월16일)

동인련 홈페이지의 자유 게시판에서는 이따금씩 종교와 동성애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면 그는 거의 도맡다시피 상세한 답변 글을 올리며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동성애가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여러 책을 탐독했다. 그는 기독교계 신문이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기사를 실을 때마다 분개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활동적이고 유쾌했지만 게시판에 실린 과거 그의 글에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잘 드러나 있다. ‘솔직히 우리 나라에서 이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 있는 살얼음판을 디디는 꼴이다. 커밍아웃하기 전에 숨 죽이고 다니느라 마음 고생이고, 모든 걸 다 숨겨야 하니까. 커밍아웃하고 나면 사실상 자살 행위에 가까울 정도이다.’

마음을 굳힌 듯 그는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하순에는 같이 활동하는 회원에게서 디지털 카메라를 빌렸다. 그 안에는 ‘육우당’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돌려준 디지털 카메라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이 회원은 “육우당은 실수로 사진이 모두 지워졌다고 말했지만, 마음 정리를 하려 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4월28일 ㅇ군이 다니던 성당 신부님이 집전한 장례 미사가 끝나고, 그는 한 줌 재로 돌아갔다. 동인련 정 욜 대표는 “비관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죽음은 동성애를 억압하는 우리 사회가 빚어낸 타살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3일 국내 인권단체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밤을 열었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난 여러분이 유황불 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녀’니까요. 난 그저 편안히 쉬고 싶습니다. (중략) 홀가분해요.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는 동성애자다’라고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받지도 않아요.’ 그는 죽음으로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관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커밍아웃’시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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