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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조약은 멀고 총알은 가깝다

최재천(변호사법무법인한강대표) ㅣ 승인 2003.04.17(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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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전쟁은 세 가지 방식으로 시작된다. △선전(宣戰) 통보 △조건부 선언을 수반한 최후 통첩 △사실상의 전투 행위. 전쟁 개시에 관한 국제 조약인 ‘헤이그 제3 조약’은 ‘명시적인 전투 의사 표시에 의한 전쟁 개시’만을 합법으로 정해놓았다. 따라서 사실상의 전투 행위에 의한 전쟁은 불법이다.

전쟁에서 가장 억울한 피해자는 늘 백성이고 민간인이었다. 중세 이전, 칼을 쥔 자들은 아군 외에는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곤 했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와 기사도 정신의 영향을 받은 중세 말이었다. 이후 민간인 보호는 관습법으로 인정되다가 1907년 헤이그 협약, 1949년 제네바 제4협약, 1977년 추가의정서 등을 통해 성문화했다.

1951년 <뉴욕 타임스>의 종군기자 조지 배럿은 경기도 안양 북쪽의 한 마을에서 ‘현대식 전쟁의 총체성을 보여주는 섬뜩한 증거들’을 발견했다. ‘마을과 들판에 있던 주민들이 폭탄 세례를 받고 죽어 있었는데, 네이팜탄이 공격하기 직전 취하고 있던 자세 그대로였다. 예컨대 막 자전거를 타려는 남자, 고아원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 소녀 50여 명, 이상하게도 상처 하나 없이 한 손에 미국 백화점 카탈로그에서 찢긴 ‘매혹적인 여성용 잠옷 - 산호빛’, 2.98달러, 우편 주문번호 3,811,294에 크레용이 칠해진 종이 한 장을 쥐고 있는 주부가 그러했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413쪽)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피해자는 민간인이었다. 이번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국제 규범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라크 전쟁을 보도하는 외신들에 의하면, 오폭 등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벌써 수 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다 민간 복장을 한 게릴라와 자살 폭탄 테러에 고전하던 펜타곤(미국 국방부)은 새로운 전쟁 지침을 전달했는데, 민간인 피해가 더 늘어날 것 같아 염려스럽기만 하다. 새 지침에 따르면, 이라크 내 모든 검문소에서 운전자와 탑승객은 모두 차에서 내려 손을 든 상태에서 조사에 응해야 한다. 또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이라크인이 다가오면 우선 정지 명령을 내리는데, 만일 손을 빼지 않으면 사살하라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순간적인 오판이 무고한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선전 포고와 같은 절차에 의해 시작된 전쟁은 대개 휴전과 종전 등으로 종결된다. 휴전의 한 종류로 정전이 있다. 정전은 교전국 군대의 합의에 의한 단기간의 부분적·일시적인 전투 행위 중지를 의미한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서명되어 같은 날 발효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휴전협정’ 또는 ‘군사정전협정’은 본래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조선)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라는 긴 이름을 갖는다. 남과 북은 현재 이 상태에 놓여 있다.

정전협정 때 현장에 있었던 미국의 한 기자는 ‘인간의 기나긴 전쟁사 중에 이렇게 불신에 바탕을 두고 휴전이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정전이 아니라 선전 포고에 조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윌리엄 스툭, <한국전쟁의 국제사>, 671쪽). 그 불신은 지금도 이어져 핵 위기로 번지고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통일밖에 없다. 하지만 당분간이라도 정전협정을 넘어 종전(終戰)이나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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