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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죽음보다 두려운 가난과 고독

서울의 마지막 산동네인 은평구 구산동 ‘결핵촌’. 산비탈 판잣집에 사는 1백87세대 2백62명의 삶은 비참하다. 그들에게 한가위는 오히려 고통이다.

고제규 ㅣ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9.02(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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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 늘어선 공동 화장실, 4∼5개의 수도꼭지가 달린 공동 수도, 한 사람만 겨우 지나 다닐 만한 좁은 골목길, 골목길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쪽방. 지난 4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난곡동 풍경이 아니다. 서울 은평구 구산동 산61번지. 1백87세대 2백62명이 사는 서울의 ‘마지막 산동네’다. 구산동 산동네는 ‘집병촌’이라 할 수 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형성된 곳이다. 이른바 결핵촌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결핵 전문 병원인 시립 서대문병원 뒤쪽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다.
구산동 결핵촌이 최근 개발 논란으로 들썩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추진한 서울시와 은평구는 지난 8월13일 주민 공청회를 열었다. 6평과 9평짜리 공공 임대 아파트를 지어 산동네를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대가 완강했다. 가장 작은 평수인 6평 아파트의 임대 조건(보증금 1천2백만원, 월 임대료 18만원)도 산동네 주민들에게는 문턱이 높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천만원대는 자신들에게 로또 당첨금만큼이나 손에 넣기 어려운 목돈이라고 말한다. 주민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투기꾼들이 벌써부터 딱지(분양권)를 6천5백만원에 사간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한가위를 앞두고 기자가 찾은 서울의 마지막 산동네는 더욱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한영철씨(60)는 산동네 역사의 산증인이다. 산동네가 들어선 초기에 정착한 원로급이자 1세대이다. 대구가 고향인 한씨는 부모를 여의고 혼자 상경했다가 결핵에 걸렸다. 시립 서대문병원에서 무상 치료를 받은 뒤 갈 곳이 없어 1964년에 천막을 치고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 천막 세 채로 시작한 판자촌은 지금은 산 전체를 덮고 있다. 1세대지만 한씨는 여전히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동안 열네 번 이사했다는 한씨가 지금 사는 쪽방은 한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보증금 10만원에 월 4만원짜리.

산동네에도 계층이 나뉜다. 한씨와 같은 세입자는 1백8명이고, 가옥주는 78명이다. 가옥주들은 쪽방 한 개당 4만~10만 원의 방세를 받는다. 보통 ‘한 지붕 네 가족 살이’가 기본이다. 쪽방이 많은 곳은 한 집에 여덟 가구가 모여 산다. 가구라고 해보아야 대부분 혼자다.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이 예정대로 시행된다면 그는 오갈 데가 없다. 세입자는 이주비를 한푼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씨는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로 매달 25만9천원을 받는다. 8월21일 현재 그의 통장에는 11만원이 남아 있었다. 다음달 보조금이 지급되는 9월20일까지 그는 이 돈으로 생활해야 한다.

김영호씨(49)는 1996년 산동네에 정착했다. 김천이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혼자 상경했다. 아버지가 송곳 하나 꽂을 만한 논밭도 못 가진 소작농인지라, 일찌감치 그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을지로 중부시장의 봉제 공장에 ‘시다’로 취직한 그는 공기 반 먼지 반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그가 받은 첫 월급이 5백원. 모두 집으로 보냈다. 그 덕으로 두 여동생이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대신 그의 몸이 병들어갔다.

결핵은 가난병이다. 잘 먹고 푹 쉬면 완치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앞만 보고 내달린 ‘새마을운동 세대’에게 쉬는 것은 사치였다. 김씨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1970년 11월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비슷한 또래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분신했다는 소문도 들었지만, 그는 한눈 팔지 않고 일했다. 1989년 생산과장으로 승진했다. 살 만해지나 싶었지만 불청객이 찾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결핵균이 폐를 갉아먹은 것이다.

만병에 효자 없다고 결핵에 걸리자 스스로 가족과 멀어졌다. 어머니에게, 시집간 여동생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추석이면 가족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서 명절이 더 괴롭고 힘들다.”

송규옥씨(52)와 김춘화씨(43)는 부부다. 부부가 모두 결핵 환자로 호흡기 장애 1급이다. 둘 다 산소통에 의존해야 한다. 방에는 산소통 2개가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산동네에서 인연을 맺어 1994년부터 함께 산다. 번듯한 결혼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여느 부부 못지 않다. 그런 김춘화씨에게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지난 2월, 남편 송규옥씨가 다시 결핵에 걸렸다. 산동네에 거주하는 결핵 환자는 치료가 된 음성 환자지만,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 송씨는 요즘 1주일에 두 번씩 시립 서대문병원을 다닌다. 8월21일 오전 11시, 송규옥씨는 아랫동네에 있는 시립 서대문병원에 다녀왔다. 보통 사람이 20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그에게는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송씨는 결핵이 가져다 준 합병증까지 앓고 있다. 독한 약을 먹다보니 식도염이 생기고 위가 나빠졌다. 더구나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전립선까지 나빠졌다. 대부분 결핵 환자는 송씨처럼 한두 가지 합병증에 시달린다. 방에 걸린 달력에는 두 사람이 병원에 가야 할 날이 가득 적혀 있다.

손 아무개씨(50)와 김 아무개씨(48)는 대낮인데도 취해 있었다. 담배도 물고 있었다. 한쪽 폐 기능을 상실한 김씨에게 담배는 치명적이다. “울화통이 터져서 한잔했다.” 김씨는 전직 마도로스, 요리장이다. “답답하다. 할 일이 없다. 나도 일을 하고 싶다. 정부가 주는 31만원을 안 받고 살고 싶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일을 해서 돈을 벌 수도 있다. 하지만 소득이 생기면 기초생활 수급액이 그만큼 깎인다. 그래서 굳이 일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막걸리 한 통을 마신 손 아무개씨도 “술을 마시면 불우한 처지를 잊는다. 간경화 증상도 있어 내게 술이 독인 것을 안다. 그래도 술을 마셔 괴로움을 잊고 싶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서서히 파괴시켜가는 두 사람에게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

또 다른 김 아무개씨(53)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는 전직 대학 교직원이다. 한때 회사 홍보팀과 대학 홍보팀에서 일하며 중산층 수준으로 살았다. 그의 방에 놓인 카메라 교본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는 1983년 결핵에 걸린 뒤 가정이 파탄 났다. 처음에는 그도 가족의 보살핌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 1995년 결핵이 재발했고, 2년 동안 치료를 했다. 치료가 끝나자 외환 위기가 터졌다. 결국 회복 불능이었다. 오랜 기간 병 간호에 지친 부인이 떠나갔다. 그도 자포자기 심정이었고, 스스로 친구도 끊었다.

그후부터 김씨는 산동네에 들어와 책을 보며 지내고 있다. 그의 방에는 책이 많다. 얼굴까지 전신 화상을 입었지만 가족의 보살핌으로 재기해 화제가 된 이지선씨의 수필집 <지선아 사랑해>도 있었다.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선이도 좌절했을 것이다. 가족은 어찌되었든 힘이 된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김지환씨(55)는 아랫동네 PC방에 자주 간다. 소일거리가 없다보니 그가 새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 인터넷이다. 김씨는 정치에 관심이 많다. 목포 출신인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금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1969년 청년 김대중이 광주학생회관에서 사자후를 토하며 연설하는 모습에 반했다는 그는 역대 선거 투표에 불참한 적이 없다. 지난 대선 때도 ‘노짱’을 지지했다는 김씨는 요즘 민주당사에 자주 전화를 건다. “신주류가 뭐하고 있는 것이냐. 빨리 뛰쳐나와서 신당을 만들어라. 내년 총선에 승산이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김씨는 DJ와 비슷한 어투의 정치평을 늘어놓았다. 주거 환경 개선과 관련해서도 그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파트? 어림도 없다. 김치국부터 마시지 말라.”지연(19·가명)이는 1985년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산동네의 유일한 어린이였다. ‘산동네둥이’ 지연이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지만 여전히 가장 어리다. 지연이는 중학교 다닐 때까지 산동네에서 사는 것이 부끄러워 친구들에게도 숨겼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지연이는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고 집에도 데려왔다. “내가 친구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다. 하지만 가난은 숨길 것이 아니다”라고 지연이는 말한다. 고3이지만, 지연이는 가정 형편 때문에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시립 서대문병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시간당 2천3백원씩 한 달이면 25만~27만 원을 받는다. 이 돈은 모두 엄마에게 준다. 진로에 대해 묻자 “대학 진학 대신 취업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난곡이 재개발되면서 서울의 달동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들 했다. 그러나 구산동 산동네는 엄연히 존재한다. 산동네 주민들의 바람은 한 가지다. ‘진정 주민들을 위한 주거 개선 사업이 되어 주기를.’ 산동네둥이 지연이부터 1세대 원로 한영철씨까지 한가위 보름달을 향해 빌어보는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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